겨울 나목(裸木)의 꿈(dream of winter bare tree)
가을사랑
나무는 겨울에 가장 순수하다. 겉치장을 다 던져 버리고 자신의 내면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나무에게 가장 가깝게 다가갈 수 있는 때는 나무의 모든 잎이 떨어져 버린 다음이다. 알몸으로 나무는 내게 다가왔다. 나무는 뿌리를 빼고는 모든 것을 드러내 놓고 있었다. 밑둥지에서부터 하나씩 뻗어나간 가지들의 섬세한 윤곽이 모두 드러나 있었다.
잎들이 붙어 있었던 가지의 맨 끝에서는 잎이 떨어진 흔적도 남아 있었다. 그곳에는 나뭇가지와 잎이 이별한 상처가 남아 있었다. 너무 많은 잎과의 이별이라 별 의미가 없어 보이기도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방관자적 관찰에 불과했다. 나무에게는 하나 하나의 잎과의 이별이 모두 심각했을 것이다.
자신과 삶을 같이 했던 그 잎들은 하나 하나가 나무와 고유한 인연을 맺고 있었을 뿐 아니라, 나무에 생명을 주었고, 나무와 사랑을 했던 삶의 동일체였다. 그 나무의 주변 숲에 수 억만개의 나뭇잎들이 존재했었다고 해도, 한 그루의 나무에 맺혔던 잎들은 아주 개별적이고 고유한 운명의 끈으로 맺어져 있었던 사랑의 분신이었다.
나무는 그 잎으로 구별된다. 나뭇잎은 그 나무가 어떤 나무인지를 알려주는 상징이었다. 나무의 이름이었다. 나는 내가 어떤 나무인지를 생각해 보았다. 나는 과연 어떤 성격을 가지고, 어떤 이름이 붙여질 수 있는 나무일까?
문득 내 나무의 모습과 색깔을 그려보고 싶었다. 다른 나무들과 어떻게 구별될 수 있을까? 다른 나무들과 아무런 차이가 없는 똑 같은 나무에 불과한 것일까? 과연 다른 것이 좋은 것일까? 아니면 똑 같아야 정상일까? 내가 나무라면 내 나뭇잎들은 어디에 있을까? 어디로 날아가 어떤 상태에 있을까? 내 나뭇잎들을 지금 보고 있는 사람들은 누구일까?
내 나뭇잎들은 나로부터 나오는 말과 행동일 것이다. 그 잎들은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떨어져 조금씩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그들은 내 잎들을 보고 나를 알아보았을 것이다.
오후에 청계산으로 갔다. 겨울산의 모습을 보기 위해서였다. 겨울산행을 하기 위해서는 약간의 용기와 결단이 필요하다. 무척 날씨가 쌀쌀해서 밖에 나가 운동을 한다는 것은 상당한 결단이 있어야 한다. 그럼에도 간단히 무장을 하고 산에 오르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사람들이 많았다.
많은 사람들이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산에 왔다. 굴다리에 있는 야채 파는 곳에도 상인들은 없었다. 사고 파는 물건들이 보이지 않고 빈공간으로 있으니 서운했다. 무언가 있어야 할 곳이 비어있다는 것은 서운함을 가져온다. 겨울산의 흙은 어쩐지 딱딱해 보인다. 다른 계절과 달리 겨울에는 나름대로의 비장함이 서려 있다.
계곡물은 얼어 있었고, 그곳에는 얼음이 보였다. 청계산에서는 우측통행표시판이 있었다. 그래서 오른쪽으로 올라갔다. 매봉까지 올라가니 산바람이 차가왔다. 산위에서는 바람이 매섭다. 아무 것도 막아주지 않는 곳에서 맞아야 하는 바람은 차갑고 무섭기까지 하다. 바람소리를 들으며 걸었다. 바람 때문에 빨리 걸었다. 걸음을 재촉한 것은 바람이었다. 옷속으로는 땀이 배었고, 그 땀이 식으니 한기가 느껴졌다.
무자년 첫날이라 새해의 감흥이 그대로 살아있었다. 세월이 빠르다는 생각도 들었으나, 그것은 중요치 않다고 생각했다. 하루 하루가 중요할 뿐이다. 시간을 정지시켜서는 안 된다. 시간은 흘러가고 있으니 그 시간을 아껴서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소중한 시간을 아껴 쓴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문득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어수선한 연말연시의 분위기에서 벗어나 빨리 차분한 일상으로 돌아가야 한다. 세상이 너무 넓어 개인들의 삶은 자신이 현재 처해 있는 좌표를 확인하기가 어렵고, 너무 잘나고 너무 독하게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아 쉽게 콤플렉스를 느끼게끔 되어 있다. 잘나고 똑똑한 사람들을 너무 많이 보여주는 매스콤의 영향도 크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심한 경쟁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어 편안하게 생존을 할 수 있는 여건이 아니다.
늘상 불안하고 초조한 가운데 사람들은 현대사회를 살아가야만 한다. 물질만능의 그릇된 풍조 아래서 거기에 맞추어 흉내라도 내야만 견딜 수 있는 오늘 날 우리는 너무나 기계적이고 비인간적인 현상들에 너무 좌절하고 식상해 하고 있다.
그 훈훈한 인정은 자꾸 사라져 간다. 그나마 정성을 들여 주고 받는 연말연시 연하장도 사라지고 있다. 대신 몇 초 만에 간단히 보낼 수 있는 휴대전화 문자메시지가 연하장을 대신하고 있다. 12월 31일 하루 동안에 9억 건에 가까운 휴대전화 문자메시지가 전해 졌다고 한다. 그 문자메시지를 받고 난 소감은 어떠한 것일까? 내 휴대전화에도 여러 통의 문자메시지가 찍혀 있었다. 삭막한 겨울 밤에 우리는 다시 한번 우리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시간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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