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산 겨울 나그네(winter traveler in the Mt. Bukhan)
가을사랑
조용한 음악이 흐르고 있는 밤이다. 커피의 진한 향과 함께 사랑이 전해지고 있다. 겨울이 처음 올 때는 많은 설레임이 있었다. 첫눈이 내릴 때 우리는 감격했다. 그토록 파랗던 나뭇잎들이 다 떨어지고, 그 위에 눈꽃을 피워놓았던 시간에 우리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누구를 위한 겨울꽃이던가? 눈을 맞으며 눈꽃 위에 사랑의 눈물을 흘렸다. 눈물은 눈꽃 위에 떨어져 또 하나의 꽃잎을 더했다. 사랑의 진한 의미를 담은 눈꽃은 우리에게는 생명이었고, 운명처럼 남았다. 이룰 수 없는 사랑은 이루어진 사랑보다 더 진하고 향기롭다. 사랑은 얼마나 오래 지속되었는가 보다는 얼마나 강하게 뜨겁게 서로를 불태웠느냐가 중요하다.
겨울이었지만 맑은 날씨였다. 햇빛이 화사하게 서울 거리를 비추고 있었다. 한강 위에는 반짝이는 빛이 움직이고 있었다. 내 마음은 출렁이는 그 강물을 따라 멀리 바다까지 떠내려가고 있었다.
중간 중간 마음은 아름다운 새소리도 들을 수 있었고, 어디론가 쏜살같이 달려가는 차들도 보았다. 강변에 있는 찻집도 보고, 흘러가는 하얀 구름도 보았다. 꿈을 꾸는 사람은 행복하다.
현실에서 잠시나마 떠날 수 있는 것은 우리의 특권이다. 꿈속에서는 아름다운 사랑이 미소를 짓고 있었다. 겨울 사랑은 꿈을 꾸게 만들었고, 나는 그 사랑의 꿈 안에서 어린 아이처럼 마냥 행복했다.
택시를 타고 구기동까지 갔다. 택시 기사는 내가 등산을 가는 것을 무척 부러워했다. 그 기사는 등산 대신 축구를 한다고 한다. 나는 그 기사가 축구를 하는 것을 부러워했다. 각자의 삶은 환경에 따라 달라진다. 모든 것을 다 할 수는 없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여건에서 최선의 선택을 하는 것이 인생이다.
구기동 매표소에서 산행을 시작했다. 날씨가 좋아서 그런지 사람들이 많았다. 등산을 마치고 내려오는 사람들 때문에 빨리 걸을 수도 없었다. 봄 날씨 같았다.
낙엽들이 땅에 떨어진 다음 사람들에 너무 많이 밟혀서 짓이겨져 있었다. 가을 날 그 아름답던 낙엽들의 운명이 안타까웠다. 떨어지고, 밟히고, 찢어지고, 사라져가는 운명이었다.
산에서 걸을 때는 가급적 머리 속을 비우고 싶었다. 아무 생각을 하지 않고 그냥 나무와 바위를 보고 싶었다. 흘러가는 바람을 느끼고 싶었다. 흙을 밟으면서 낙엽도 유심히 살펴보려고 했다. 북한산과 조금이라도 친해지고 싶었다.
대남문까지 올라가는 길은 따뜻했다. 대남문을 넘어서서는 달랐다. 눈도 아직 녹지 않은 곳이 있었다. 계곡에는 얼음도 많이 보였다. 대남문을 두고 이쪽과 저쪽은 그렇게 달랐다. 양지와 음지는 많이 다르다. 공기도 차가워졌다. 사람들도 거의 없었다. 대남문까지는 2.5킬로미터다. 대남문부터 북한산성 매표소까지는 5.5킬로미터다.
겨울산의 풍경은 너무 아름다웠다. 가을과는 또 다르다. 쓸쓸함이 밑에 깔려 있는 상태에서 웬지 모르게 빈 여백이 주는 정감을 느낄 수 있었다. 이별을 한 연인들이 느끼는 허전함은 겨울산이 지니고 있는 분위기였다.
헤어지고 난 다음에 눈물을 흘리고 있는 사람들이 찾아와서 외로움을 달래고 가는 곳 같았다. 사랑을 잃은 나그네들이 가슴 아파서 계곡의 얼음을 보며 발길을 돌려야 하는 곳이었다.
사랑을 찾는 겨울 나그네의 모습이 보였다. 영원한 사랑을 손에 쥐고 싶어 가슴을 치는 그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겨울 구름은 쓸쓸한 표정을 지으며 산 너머로 사라져갔다.
거의 다 내려오면 식당들이 많다. 한 곳으로 들어갔다. 막걸리를 마셨다. 떠들썩한 분위기 속에서 술을 마시고 북한산을 바라보니 조금씩 어두워지는 저녁풍경이었다. 땅거미가 내리고 있었다.
술기운에 겨울의 향기를 더듬어보았다. 겨울의 나그네로서 나는 산에 머물고 있었다. 어디론가 다시 떠나야 할 나그네는 술병을 놓지 못했다. 가슴 아프게 했던 사랑이 술병에 담겨있었다. 밤이 되면서 산 공기는 많이 차가워졌다.
무척 길게 느껴졌던 산행을 마치고 내려오니 마침 택시가 기다리고 있었다. 구파발역까지 간다고 한다. 고마웠다. 추운 날씨에 버스를 타는 곳까지 가지 않아도 됐다. 택시 기사는 그곳 은평뉴타운 개발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해주었다.
3호선을 타고 오다가 종로3가역에서 내렸다. 종로에는 길가에 포장마차가 많이 들어서 있었다. 좋은 구경거리였다. 서울의 겨울밤은 그렇게 깊어만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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