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의 옷자락
가을사랑
어떤 여인이 12년 동안이나 중병을 앓아왔다. 병이란 육체를 고통스럽게 하고 정신을 짓누른다. 그것도 중한 병에 걸려 있으면 몸과 마음은 제대로 기능을 하지 못하며 항상 죽음을 목전에 두고 살아가야 한다.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치료방법을 동원해 보았지만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사람들이 좋다고 하는 약은 다 써보았고, 용하다는 의사는 다 만나보았다. 그러나 아무도 그 병을 고쳐줄 수는 없었다. 이른바 불치병이었다. 그녀는 예수님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얻으리라고 믿었다. 그래서 그 여인은 예수님 몰래 뒤로 다가가서 예수님의 옷자락을 잡았다. 그럼으로써 그녀는 오랜 세월 자신을 억눌러왔던 혈루병이 완치되었고 질병의 고통에서 해방되었다. 마가복음 제5장에 나오는 이야기다.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한 여자가 예수의 옷에 손을 대니 병이 나았다. 예수께서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하고,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찌어다"(마가복음 5:25~34).
아무에게도 의지하지 않고, 혼자서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은 너무 불안하고 위험하다. 혼자 올바른 방향을 찾아 걸어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냥 방황하면서 시간을 보내는 것은 아닌지 모른다. 어린 아이가 어떻게 혼자 독립해서 세상을 살아갈 수 있을까?
어린 아이에게는 부모가 있어야 하고, 그가 독립해서 생존할 수 있을 때까지 그는 보호를 받아야 한다. 사랑을 필요로 한다. 그렇지 않고 내팽겨쳐지면 그는 생명을 잃게 된다. 우리는 단순한 육체로 살아갈 수는 없다. 정신과 영혼이 있어야 살 수 있다.
그런 영혼과 정신은 우리가 나이를 먹어도 누군가 우리를 인도하고 이끌어주고 보호해 주지 않으면 제대로 유지될 수 없다. 제대로 자라기 어렵다. 혼자의 힘으로, 혼자의 지능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자칫 개똥철학을 가지고 그릇된 방향으로 빠지기 쉬운 것이다.
독학으로 공부한다는 것이 그래서 어렵고 그릇된 편견을 가지기 쉬운 것과 마찬가지다. 머리가 좋고 똑똑한 사람들중에 그런 사람들이 많다. 하나님을 믿지 않고 아무런 신앙도 없이 혼자 잘 났다고 자신의 능력만을 믿고 자신만만하게 살아간다.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대학교를 졸업하고 좋은 직장을 갖는다.
거기에서 승승장구한다. 출세하고 돈도 벌고 결혼도 잘 하고 건강하게 지낸다. 세상의 온갖 행복을 누리고 남부러울 것이 없다. 그러나 이런 사람도 나중에 시간이 가면 예상치 못한 시련과 고통을 겪게 된다. 그때 그는 좌절하고 낙담하지만 어디에 의지할 곳이 없어 불행하게 된다.
그런 시련을 겪지 않아도 죽을 때 돌이켜 보면 너무나 잘못한 것이 많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너무 잘 나서 주변 사람들을 무시하고 혼자 잘 먹고 잘 살았다는 후회를 하게 된다. 너무 이기적으로 살아 죄를 많이 짓고 남에게 사랑을 베푼 일은 거의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알게 모르게 죄를 많이 지은 것이다. 그것이 인간의 한계다. 자칫 그런 사람들은 나이가 들어 정신적으로 황폐하게 되며 무엇 때문에 그렇게 열심히 바쁘게 살아야 했는지 조차를 모르게 되는 것이다.
특히 우리 영혼은 인간의 원죄를 가지고 태어났기 때문에 언제나 악에 빠질 수 있고, 교만해지고 사악해지며, 잔인한 성향을 보일 위험이 있다. 그러므로 인간의 영혼은 그 영혼의 빛이 되고, 등대가 되며, 사표가 될 수 있는 존재를 필요로 한다.
그 존재가 예수님이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받들고 살아가는 것이 망망대해에서 표류하지 않고 목적지까지 안전하게 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고 길이다. 그런 이치를 깨닫지 못하고 평생 혼자서 자신만을 믿고 의지하며, 혼자 고군분투하겠다는 사람은 어리석은 것이다.
혼자 도를 터득한다고 하는 것도 비효율적이다. 벌써 2천년이 넘게 수많은 선지자들이 평생을 바쳐 깨우치고 연구해서 갈고 닦아놓은 것이 기독교다. 기독교는 이미 충분히 검증되었다. 통계적으로도 기독교를 믿는 사람들은 믿지 않는 사람들보다 악에 빠지지 않고 건전하게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그러므로 이제는 예수님을 믿고 의지하고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어떨까? 우리는 주님의 옷자락을 붙잡고 살아가야 한다. 인간은 구체적으로 눈에 보이는 것을 잡아야 한다. 그렇지 않고 추상적인 존재에 대해서는 아무리 믿는다고 해도 회의가 들고 확신이 서지 않는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다.
성령 역시 느낄 수만 있지 직접 성령을 보거나 손에 잡을 수는 없다. 그러나 예수님은 인간의 모습으로 이땅에 오셨다. 그래서 우리가 볼 수 있다. 더군다나 예수님의 옷자락은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을 뿐 아니라 직접 손으로 만질 수 있다. 비록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박히셨지만 다시 부활하셨다.
그래서 우리는 아무 때고 예수님을 만날 수 있다. 예수님은 언제나 우리가 원하면 기도를 통해 만날 수 있다. 우리는 24시간 예수님을 부를 수 있다. 주님이라고 부른 다음 기도를 하면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다가오신다. 그러면 우리는 연약한 우리를 주님께 의탁하고 모든 것을 맡기면 된다.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무엇을 어떻게 결정해야 할지? 현재의 고난을 어떻게 당해야 할지? 모든 것을 믿고 맡기면 된다.
그러면 주님께서 응답해 주신다. 우리를 위로해 주시고, 우리를 격려해 주신다. 우리가 어렸을 때 모든 문제를 부모님께 맡기고 해결해 주시기를 바랬듯이 똑 같은 이치로 부모님들이 계시지 않으면 세상에서는 더 이상 의지할 곳이 없고 우리를 사랑해 주는 사람이 없지만, 예수님께서는 여전히 우리 곁에 계신다.
그것을 믿어야 한다. 그래야 마음이 든든해진다. 배짱이 생긴다. 그 믿음과 배짱으로 세상을 살면 자신감이 넘치고 예수님의 뜻을 확인하면서 세상을 살아가면 돌다리도 두드리며 강을 건너는 것처럼 자신을 보호하고 안전하게 세상을 살아갈 수 있다. 이것은 주님의 은혜로 우리가 만사에 형통하고 시련에 빠지지 않으며 악에서 멀어질 수 있음을 의미한다.
세상에서 배우는 도덕이나 윤리만으로 세상을 살 수는 없다. 도덕 교사가 제대로 가르쳐 주지도 않을 뿐 아니라, 그것을 가르치는 사람 자체가 죄를 짓고 부도덕한 인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완전하지 못한 사람이 위선적으로 가르치는 도덕이나 훈계를 제대로 따르기는 어렵다. 나이가 들면 그것 자체가 불완전하고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바뀔 수 있는 가변적인 것이 법이고 도덕이며 상황논리에 따라 정의도 흔들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영원한 법을 배우고 따르기 위해서는 주님만 바라보아야 한다. 주님은 알파요 오메가다. 처음부터 영원까지 이 세상을 주관하시며 참된 진리만을 선포하고 계신다. 주님의 옷자락을 붙잡고 우리가 있어야 하는 또 다른 이유는 고난을 당할 때 의지할 곳이 바로 그곳이기 때문이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에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로마서 10:9~10).
주님의 옷자락을 결코 놓아서는 안 된다. 생명을 건지는 유일한 밧줄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주님의 뒤에서 옷자락을 붙잡아야 한다. 건방지게 주님의 발을 밟아서는 안 된다. 주님을 사랑하되 주님을 경건한 마음으로 따라야 한다. 그러면 주님은 우리를 구원하여 주신다. 우리에게 영원한 진리를 깨우쳐 주시고, 주님의 말씀을 따르면 우리에게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주신다.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저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로마서 10:11~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