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History of Israel (7)
가을사랑
[7] 마카비 반란(B.C.167~134년)
샐류쿠수의 헬라화 정책에 대한 반발이 처음 시작된 곳은 모딘이었다. 안티오쿠스이 사자는 셀류쿠스 정부에 대한 존경의 표시로 모딘에 이방신 제단을 설치할 것을 요구하였다. 맛다디아는 신성을 모독하는 행위를 하지 않겠다며 즉시 거부했다.
수리아의 억압정책은 여호와에게 드리는 모든 성전 예배를 중지시키고 할례를 금지시켰으며 토라 연구를 금지시켰다. 맛다디아는 반란을 일으켰다가 죽었고, 그의 아들인 유다 마카비가 대를 이어 반란을 계속했다.
[8] 하스몬 왕국(B.C.135~63)
셀류쿠스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점차로 쇠퇴해지고 있었고, 두 왕조 모두 내부적인 문제로 멸망에 다가가고 있었다. 로마 역시 B.C.133년 그라치 가문이 일으킨 내란 때문에 혼란에 빠져 있었다. 이러한 내전은 B.C.33년 아우구스투스가 원수정치를 수립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로마는 동쪽의 수리아와 팔레스타인 정사에 개입할 여유가 없었다.
데미트리우스는 셀류쿠스이 통치 170년째 되던 해인 B.C.142년 시몬 마카비에게 독립과 아울러 조공을 면제해 주었다.
당시 유대 문화 속으로 점차 침투해 들어오는 헬레니즘 문화와 사상에 대한 반발로 많은 분파가 새로 생겨났다. 그중에서 경건파 하시딤은 가장 보수적인 유대인들로 구성되었다. 그들은 종교적 자유와 율법에 대한 철저한 준수를 주장하고 모든 형태의 헬라적 문화와 사상을 배척하였다. 이 하시딤은 나중에 바리새파가 된다.
B.C.63년부터 로마는 예루살렘을 통치하게 되었으며 유대는 로마에 조공을 바쳐야 했다. 히루카누스 2세는 예루살렘의 대제사장으로서 제한적인 구실을 계속했다. 그러나 그의 동생 아리스토불루스는 로마의 포로로 압송되었고, B.C.61년 폼페이의 개설행렬 때 전시되었다. 이렇게 하여 하스몬 시대는 막을 내리게 되었다.
로마가 이스라엘과 유다의 옛땅으로 입성하여 이 지역이 수리아주로 편성됨으로써 구약의 이스라엘 역사는 모두 끝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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