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 난해 구절 해석


가을사랑


Ⅰ. 인용에 있어서 문제가 있는 듯한 구절 해석


1. 마태가 왜 스가랴 선지자가 말한 내용을 예러미야의 예언으로 인용했는가?


마태복음 27:9~10의 인용은 예레미야 32:6~9의 내용과 스가랴 11:12~13의 내용을 혼합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 경우 예수님은 당시 성경 해석의 원리에 따라 예레미야 선지자의 이름을 사용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


2. 다윗이 성전에서 진설병을 먹을 때 대제사장은 누구였는가?


한 해결방법은 아버지와 아들이 같은 이름을 가지고 있었고 사무엘상과 사무엘하, 역대상에서는 교대로 사용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다른 해결방법은 다윗이 진설병을 먹을 때 아비아달도 그의 아버지 제사장 아히멜렉과 함께 그 자리에 있었다. 따라서 마가복은 2:26은 아비아달 대제사장 때에 다윗이 진설병을 먹은 사건이 발생한 것으로 기록할 수 있다.


Ⅱ. 서로 상충되는 듯한 구절 해석


1. 세 곳에 기록된 바울의 회개사건들이 왜 서로 일치하지 않는가?


바울은 교회를 핍박하기 위해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 회개하였다. 바울의 회개에 대한 세 개의 기록은 본질적으로 일치하지만 강조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다. 각 기록은 문맥에 비추어 해석되어야 한다. 세 곳의 기록에 나타난 차이는 자연스러운 것이고 문체적으로 아주 귀중하지만 내용의 일치에 있어서는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다. 우리는 성경저자에게 표현의 자유가 있음을 인정하고 같은 사건을 기록할 때 맹목적인 일치만을 요구해서는 안 된다.


2. 가룟 유다는 어떻게 죽었는가? 마태의 기록과 사도행전의 기록의 차이를 어떻게 조화시킬 수 있는가?


누가가 유다가 맞이한 죽음을 창자가 터져 죽었다고 기술한 것은 유다가 어떻게 죽었느냐는 죽음의 방법을 기술하지 않고 죽음의 결과를 기술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고고학자들이 발견한 바에 의하면, 유다의 죽은 곳은 낭떠러지로 유다가 낭떠러지 위에서 나무에 매달려 죽어 아래로 떨어지면서 날카로운 바위에 부딪혀 배가 터져 창자가 다 흘러나온 것으로 간주된다. 그러므로 마태는 유다가 맞이한 죽음이 방법을 기술했고, 누가는 죽음의 비참한 결과를 기술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


3. 예수님의 광야 시험의 순서가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왜 다르게 나타나는가? 그리고 이런 차이가 성경무오설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


누가복음과 마태복음의 차이는 누가복음이 마태복음 순서의 둘째와 셋째를 바꾸어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누가가 예수님의 광야 시험을 역사적인 순서대로 따르지 않은 것은 인접 문맥의 경우처럼 그대로 따르지 않아도 좋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누가에게는 이런 자유가 있었으며 이와 같은 기록은 성경무오설과 전혀 상충이 없다. 예수님의 광야 시험의 순서를 누가보다는 마태가 더 시간적인 순서를 따랐다고 생각된다. 누가는 이 부분을 기록할 때 시간적인 순서를 그대로 따르기보다는 첫 번째 시험 후에 “모든 권세와 그 영광”에 관계된 시험을 세 번째에 기록하지 않고 두 번째에 기록함으로서 예수님의 광야시험에 더 극적인 면을 나타내기 위해 그렇게 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인접된 문맥도 같은 특징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Ⅲ. 교리적인 상충이 있는 듯한 구절 해석


1. 요한일서 3:9은 성도가 죄를 지을 수 없다는 완전론을 지지하는가?


요일 3:9의 본문은 성도가 죄를 짓지 아니하는 이유를 하나님의 씨가 그 속에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성도 안에 하나님의 거룩한 씨가 존재하는데 그 씨가 계속 자라고 확장된다는 뜻을 함축한다. 하나님의 씨를 소유한 성도가 죄를 범할 수는 있지만 성도 속에 있는 생명을 살아있는 것이다. 이 살아있는 생명 때문에 성도는 계속해서 죄 가운데서 살아갈 수 없다. 요한일서 3:9은 중생한 성도가 같은 죄를 계속해서 범할 수 없다는 뜻이지 성도가 전혀 죄를 범할 수 없다는 완전론을 지지하는 것은 아니다.


2. 천국이 침노를 당한다는 뜻은 무슨 뜻인가?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노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마 11:12)


이 구절의 해석은 비아제타이를 중간태로 보느냐 아니면 수동태도 보느냐에 달려있다. 비아제타이를 중간태로 취급하여 번역하면 “세례 요한의 때로부터 지금까지 하늘 나라는 힘있게 진전한다. 능력있는 사람만이 그것을 붙잡을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번역할 때 후반부의 내용과 전반부의 내용이 서로 잘 일치한다.


3. 칭의를 받는 것은 믿음으로인가, 행함으로인가?


바울은 사람이 의롭게 되는 데 있어서 믿음만으로 가능함을 롬 3:28에서 강조하고 있다. 반면, 야고보는 약 2:24에서 믿음과 행위의 관계를 설명한다. 야고보는 바른 믿음을 강조하고 있다. 그는 행위에서 분리된 믿음이 아니라 행위를 통해서 믿음의 실재와 믿음의 활력이 증명되는 그런 믿음을 강조한다. 살아있는 믿음은 어떤 형태로든 행위를 수반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롬 3:28과 약 2:24는 서로 상충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보완하는 역할을 한다.


Ⅳ. 맺는 말


우리가 성경에서 난해한 구적을 대할 때 상충이나 잘못이 있다는 전제하에 접근할 것이 아니요, 조화를 이룰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접근해야 한다.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정확무오하게 기록되었기 때문에 현재 우리의 지식과 지혜로는 조화를 이룰 수 없을지라도 시간의 흐름과 계속되는 연구를 거쳐 조화의 방법이 나타나게 된다. 성경의 어떤 것은 지식으로 해결할 수 없고 믿음으로만 해결되는 분야가 있다. 우리가 소유한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성경이 가르치기 때문에 우리는 마음으로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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