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추상성에 대하여
가을사랑
삶의 모든 영역을 평면적으로 열거하면 특색이 없어진다. 어느 한 가지 부분을 강조하여 그것에 심취하여 사는 것! 그것이 남다른 삶이며,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찾을 수 있는 방법이고, 삶의 기술이 아닐까 싶다.
칸딘스키와 같은 추상화가들은 그림에 있어서 색채의 강조와 형태의 과장을 부각시킨다. 그림과 마찬가지로 우리들의 삶에 있어서도 개인적인 삶의 색깔을 강조하고, 자신의 삶의 내용을 과장시키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렇다고 삶의 본질을 왜곡시켜서는 안 된다. 삶의 본질을 그대로 둔 채, 외형만을 변형시키는 것이다. 단순화시키고, 때로는 화려하게 꾸미기도 하고, 특정 부분을 강조하고, 그럼으로써 다른 사람들의 삶과 차별화시키는 것이다.
이것은 삶의 추상성을 스스로 찾아내는 것을 말한다. 삶의 구체성은 이미 다 인식되어 있다. 특별하게 강조하지 않아도 다 안다. 그러나 추상성은 다르다. 추상성은 단순화시키면서 특별한 포인트를 강조함으로써 그의 삶을 보다 명확하게 하고 선명하게 만든다.
하지만 추상성은 때로 다른 사람들에게 전혀 이해할 수 없는 표현이 될 수 있는 위험이 있다. 특정인의 삶을 추상적으로 표현하면 다른 사람들은 그것이 누구의 삶인지 알지 못하게 된다. 특히 현대사회는 물질만능시대이며, 자본과 명예가 최고의 우상이기 때문에 개인의 삶은 모두 이런 가치기준에 따라 변하고, 종속된다.
사람들은 개별적인 삶에 있어서 상당 부분 공통성과 유사성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부정할 수 없는 삶의 본질적 요소이다. 여기에서 추상성은 개별적인 구체성을 부정하고 그 위에 형성될 소지가 있다. 역사적으로 유명한 사람들의 특징은 구체성이 상실되면서 추상성만 부각되는 점에 있다. 링컨은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이라는 표어로 상징된다. 솔로몬은 ‘현명한 재판’의 이미지만으로 충분하다.
박지성은 ‘축구’로 표상된다.
이러한 추상성은 결국 존재를 근원적으로 부정할 소지가 있다. 추상성이 존재의 본질을 왜곡시키는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