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보병 1사단 법무참모가 되다

 

 

 

2군수 지원사령부 예하 부대로 101보충대가 있었다. 매주 신병들이 들어와 신체검사를 받고 전방 부대로 배치되는 과정에 있었다. 나는 정기적으로 101 보충대에 가서 군의관들과 함께 신병 신체검사 결과에 대한 판정위원으로 참여하였다. 가끔 신병으로 들어와서는 안 될 사병들이 징집된 경우가 있었다. 그러면 우리 위원회에서 귀향조치판정을 내렸다.

 

의정부에서 근무할 때 처음에는 서울 잠원동에 있는 대림아파트에서 버스로 출퇴근을 했다. 버스를 많이 타고 다녔더니 나중에는 허리도 아프고 너무 힘들었다. 그래서 의정부에 있는 주공아파트로 이사를 가서 살았다. 13평 아파트였는데 비좁았다. 연탄을 때는 아파트였다. 연탄을 가는 일도 쉽지 않았다.

 

나중에는 그곳에서 시내로 이사를 했다. 2층 집 방 2개를 전세로 얻어 살았다. 계단이 높고 가파라서 어린 아이들에게 매우 위험했다.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시간만 되면 의정부 시내 거리를 걸어 다녔다. 바람을 쐴 방법으로 유일했다. 아이들이 가끔 아파서 서울까지 병원을 다니기도 했다.

 

1981년 12월 1일 2년 간의 중위 생활을 마치고 대위로 진급했다. 사실 군대에서 소위가 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해서 4년의 정규과정을 마쳐야 소위로 임관된다. 나는 법무병과였기 때문에 몇 달간의 훈련을 마치고 바로 중위가 되었다. 중위로 2년간 근무하고 곧 바로 대위로 진급했다. 엄청난 혜택이었다. 12월 11일, 12월분 월급을 받았다. 대위 1호봉으로 246,000원이다.

 

12월 20일 의정부 집에서 용주골 관사로 이사하였다. 참모로서 관사를 이용할 수 있었다. 군인 관사는 20여채가 모여 있었다. 아담하지만 짚차를 주차시킬 수 있는 공간도 있었다.

 

법무참모 관사에는 방이 두 개 있었다. 12월 24일 사단장에게 전입신고를 하였다. 정식으로 법무참모가 된 것이다. 사단장은 육사 13기 김을권 소장님이었다. 한 부서를 책임진다는 것은 어깨가 무거운 일이다. 중위 검찰관, 상사인 선임하사, 사병 3명을 데리고 일을 해야 했다.

 

모든 것은 내 책임이었다. 나는 1사단 전체의 법적인 문제와 수사 및 재판 책임을 맡게 되었다. 전에 내가 검찰관으로 근무했던 곳이라 여러 가지가 편했다. 참모실을 독방으로 쓰게되었고, 관사를 사용하게 되었다. 짚차도 14호차가 배정되었다. 운전병도 따로 있었다.

 

사단장님은 군에 몸담고 있는 동안은 오로지 군만을 생각하며 일에 열중하라고 강조하였다. 군의 정의는 최후의 보루인 군법에 의해서 실현되는 것임을 분명히 하라고 했다. 법을 집행하는 사람의 행동은 타에 모범이 되어야 한다고 했다. 계엄처장을 지낸 분이라 법무병과에 대한 이해가 깊었다.

 

나는 사단장에게 아주 잘 보였다. 법무관으로서 모범을 보였다.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군생활에 충실하고자 했다. 머리도 짧게 깎고 매사를 군인정신에 투철하게 행동하고 사고했다. 직업 군인 못지않게 적극적으로 군을 사랑하고 아꼈다.

 

제대하고 검사로 근무하면서 김을권 사단장님을 다시 만날 기회가 있었다. 1985년 대전지방검찰청 강경지청에서 검사로 근무할 당시 김을권 장군님은 논산 연무대에 있는 훈련소장으로 근무하셨다. 나는 훈련소를 방문하여 함께 테니스를 치고 식사도 했다 관내 검찰청 검사로 근무하게 된 것은 아주 우연한 인연이었다.

 

1981년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이브에 전방철색선 순찰을 나갔다. 도라산 OP를 담당하고 있는 중대를 방문하였다. 크리스마스 트리가 도라산, 송악 OP에서 환한 불빛을 발하고 있었다. 최전방에서 고생하는 사병들을 보니 웬만한 고생은 고생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 같았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