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검사로 발령받다

 

 

 

나는 검사지원을 했다. 대학교 2학년 때 구류처분을 받은 것이 마음에 걸렸다. 혹시 임관을 못하면 어떻게 하나 걱정이 되었다. 그러나 모든 상황이 달라졌다. 군에 가 있는 동안 박정희 대통령이 시해되어 세상이 바뀌었다.

 

나는 군법무관 생활을 모범적으로 했다. 그래서 그런지 법무부에서 검사로 임명되었다는 통지가 왔다. 8월 31일 김을권 사단장님에게 전역신고를 마친 후 짐을 정리하고 용주골에서 불광동으로 나오는 시외버스를 탔다. 감회가 깊었다. 눈물이 나왔다. 3년 간 정이 들었던 군 생활을 마치고 군복을 벗으니 무척 서운했다. 직업군인도 아닌데, 왜 그렇게 서운했는지 모른다. 직업군인 못지않게 열정을 다 바쳐 군대생활을 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1982년 9월 1일 서울지방검찰청 검사로 발령을 받았다. 사법연수원 동기생 중 검사 지망생으로서는 사법연수원 성적이 제일 좋았다. 그래서 성적순으로 발령을 내는 검찰 기준에 따라 서울지방검찰청으로 발령을 받았다.

 

당시 연수원 동기생인 금병태, 강충식, 주성원 검사도 나와 함께 서울지검으로 초임발령을 받았다. 그런데 금병태 검사는 서울지검에서 근무하다가 도중에 사표를 내고 변호사 개업을 했다.

 

처음 부배치는 형사제5부로 받았다. 담당업무는 교통사고 및 환경사범 전담검사였다. 당시 교통사고처리특례법이 제정된 지 얼마 안 되어 교통사고 처리에 있어 매우 혼란스러웠다. 나는 교통사고처리특례법의 적용에 관한 기준과 해설지침 등을 만드느라고 고생했다.

 

형사5부장은 이영학 부장님이었다. 같은 부에 반헌수 선배, 조창구, 김회선, 조배숙 검사 등이 있었다. 부장 이외에 5명의 평검사가 배치되었다. 당시만 해도 형사부는 5개부였다. 그 외에 특별수사부와 공안부, 송무부, 공판부가 있었다. 차장검사도 한 명이었다.

 

검사로 발령 받자 중요한 일을 많이 하게 되었다. 직접 배당 받은 사건에 대해 책임을 지고 처리해야 했다. 시보 때와는 전혀 달랐다. 각종 행정업무도 매우 많았다. 계장 한 명, 여직원 한 명을 데리고 모든 일을 처리해야 했다.

 

내 사무실은 419호실이었다. 당시 서울지검은 대검찰청과 같은 건물을 쓰고 있었다. 덕수궁 바로 옆에 있었다. 내 방은 북쪽에 자리 잡고 있어서 덕수궁 뜰이 보였다.

 

하루 종일 사건 조사와 기록 검토, 회의 등으로 바빴다. 매일 아침 부장실에서 부 검사회의가 있었다. 사건에 관해 협의도 하고 업무에 관해 상의도 했다. 어려운 사건들이 많았다. 특히 구속사건은 매일 한 두건씩 배당되어 구속 만기에 쫓겨 야근을 하는 일이 많았다. 신임검사 교육도 마치고 나는 점점 일에 익숙해졌다.

 

검사로서 일을 하다 보니 사건을 통해 나쁜 사람들을 많이 보게 되었다. 악질적인 사기범, 교묘한 절도범, 무자비한 강력범, 강도강간, 뺑소니 교통사고 등등, 그야말로 사회의 부정적인 면만 보였다. 내 심성이 나빠지고 삭막해지는 것을 느꼈다.

 

사람 사이에 옥석을 가리는 일은 쉽지 않았다. 검찰청이나 법원에서 근무하는 사람들의 인상도 모두 만만치 않았다. 빈틈없고 날카롭게 생긴 이지적인 인상, 도도한 자세, 딱딱한 말씨 등은 나로 하여금 거부감을 느끼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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