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형사4부에서 SOFA 사건을 담당하다

 

 

검사실에서 수사하던 사건이 법정에서 변호인과 공방을 벌이다 보면 수사하는 요령을 다시 생각하게 되고 피의자의 인권보장을 하면서 수사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깨닫게 되었다. 무죄가능성이 있는 사건에 대한 집중적인 검토와 증거보완 등을 하다 보면 일주일은 그야말로 눈 깜박할 사이에 지나갔다.

 

공판부에서 근무하면서 이근우 검사님이 타고 다니던 포니차를 인수하게 되었다. 중고차였는데 마침 그 선배가 새차를 산다고 해서 내가 인수하겠다고 하니 그럼 싸게 팔겠다고 했다. 100만 원에 인수했다. 군법무관 시절 운전면허증을 받아 놓았다. 포니는 그런대로 타고 다니기 좋았다. 당시에는 공무원 자가운전제도가 확대 실시되고 있었기 때문에 그 분위기에 편승해서 차를 한대 마련했던 것이다.

 

공판부에서 근무를 시작하면서 새벽에 시청 부근에 있는 영어학원에 다녔다. 회화를 제대로 해야겠다는 의도에서였다. 아침 7시부터 8시 반까지 90분 간 외국인 강사로부터 회화를 배웠다. 새벽에 일찍 나와 영어공부를 하고 사무실에 가면 힘이 들었다.

 

퇴근하면서도 차에서 이어폰을 꽂고 영어테이프를 들었다. 집에 가서 잠을 잘 때도 테이프를 틀어놓고 잠이 들었다. 자면서도 무의식 속에 회화가 익숙해질 거라고 생각했다. 거의 1년 정도 회화에 몰두해 있었다. 장차 국제화시대에 영어회화는 반드시 필요할 거라고 믿었다.

 

공판부에서 4개월간 근무를 마치고 형사4부로 배치되었다. 조세범죄, 관세범죄, 경제범죄, 한미행정협정사건 등을 전담하는 부서였다. 김수연 부장님과 김학재 검사님, 이재술 검사님 등과 함께 나는 평검사로서 세번째 서열이 되었다. 군법무관 3년 경력 때문에 중간 서열이 된 것이다.

 

당시 함께 근무했던 김학재 검사님은 나중에 법무부 차관, 청와대 민정수석, 대검찰청 차장검사를 역임하고 퇴직하셨다. 대검찰청에서 퇴임하면서 곧 바로 내가 설립한 법무법인 태일로 들어오셨다.

 

2017년 9월 2일 토요일 오후 5시 시청 앞 프라자호텔 별관에서 김학재 변호사님 아들 혼사가 있어 윤주선 세무사님과 함께 참석했다. 변호사님은 해남 출신으로 1945년생이다.

 

나는 미군범죄전담검사가 되었다. 원래 미군범죄사건은 초임검사에게는 맡기지 않았다. 초임검사로서 미군범죄를 담당한 것은 내가 처음이라고 했다. 나는 사명감을 느꼈다. 미군범죄를 제대로 수사하기 위한 제도 개선도 했다.

 

용산경찰서 외사담당과 서울세관 외사담당, 미8군 범죄수사대, 법무감실 등과 긴밀한 수사지휘체제 및 협조체제를 갖추고 철저한 범죄단속 및 신속한 처리를 하도록 노력했다. 이 시기에는 이사화물을 가장한 호화가구 밀수사건이 중점 단속 대상이었다. 외국 차량의 한국인에 대한 불법양도사건도 중요한 이슈였다. 양국간의 법감정이 달라서 폭행사건, 교통사고도 중요한 사안이었다.

 

특히 재판권 행사 및 포기 결정이 아주 민감하고 어려웠다. SOFA사건에 대한 공부도 많이 했다. 미8군 차량출입증을 받아 업무협조차 자주 미8군에 다녔다. 그럼으로써 당시에는 모처럼 SOFA 담당검사로서 아주 적극적인 수사와 업무협조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 바람에 나는 서울지검을 떠날 때까지 계속해서 SOFA 전담검사를 했다. 1985년 3월까지 1년 3개월 정도 SOFA 업무를 담당했다.

 

이 시기에 특히 기억에 남는 사건은, 미군 CID요원들, 용산경찰서 외사과 직원 등과 합동으로 미군 내 식당 부조리 사건을 조사할 때 현장에 나가 지휘를 했던 일이다. 영어 공부를 더 열심히 하기 위해 일요일에는 용산에 있는 미군 부대 채플에 참석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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