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논산에서의 생활

 

 

 

강경읍보다는 논산읍이 컸기 때문에 우리는 자주 논산읍으로 나갔다. 강경에서 논산까지 일직선으로 연결되어 있는 도로는 아주 시원했다. 양쪽에 가로수가 죽 이어져 있어 운치도 있었다.

 

1985년 7월 부여군 세도면에서 토마토를 재배하는 농민들의 집단 시위가 있었다. 일본산 서광 토마토 씨앗을 심었던 농민들이 씨앗불량으로 농사를 망치게 되었다.

 

농민들은 피해배상을 요구하고 나섰다. 기독교농민회 배종열 회장이 서울에서 내려와 앞장서다가 10일 구류처분을 받고 구금되었다. 농민들은 배 회장 석방을 위한 기도회를 개최하면서 시위를 계속했다. 

 

나는 일본에서 씨앗을 수입해서 판매했던 종자수입판매업자를 구속해서 기소했다. 그러나 이 사건은 나중에 대법원까지 가면서 무죄로 확정되었다. 종묘관리법 규정이 애매모호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당시 농민 입장을 이해했고, 수사과정에서 씨앗의 중요성을 새삼 인식했다. 그래서 정부에서 종묘관리를 철저하게 해야 농민들에게 피해가 없게 된다는 취지의 칼럼을 써서 대전일보에 게재했다. 

 

이것을 안기부 대전지부에서 문제 삼았다. 씨앗 때문에 농민들이 집단행동을 하고 있는데 현직 검사가 불난 데 부채질 하는 식으로 정부에서 씨앗 관리를 제대로 하지 않았다고 신문에 글을 쓰면 되느냐는 비난이었다.

 

나는 지금도 당시 내가 했던 일련의 조치가 잘못됐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상급자에게 질책도 받았지만 내 소신껏 농민들을 위해 필요한 일을 했다고 생각한다. 당시 대전지방검찰청에는 박희태 검사장님이 계셨다. 후에 국회의장까지 지내신 분이다.

 

연무대에 고등학교 친구인 서동석 사장이 살고 있었다. 그리고 정약사가 있었다. 서사장과 정약사를 자주 만났다. 연무대 고깃집에 가서 자주 식사를 했는데, 고기 맛이 좋고 푸짐했다. 그리고 논산읍에서 도축장을 하던 이광수 선배님이 있었다. 그 선배 덕분에 한우고기 맛있는 것을 많이 먹을 수 있었다.

 

나는 프레스토 6111번 차를 타고 다녔다. 논산에서 주유소를 하고 있던 김영택 선배 가족과 친하게 지냈다. 김 선배는 태성관광주식회사를 설립해서 관광사업도 하고 있었다. 성냥공장을 하는 박노환 선배, 종묘상을 하는 박노은 후배도 자주 만났다.

 

강경에서 근무할 때 이태섭 씨가 논산을 방문한 적이 있다. 광석 시골집에서 사람들이 많이 모여 점심 식사를 하였다. 장인께서 주최한 자리였다.

 

대전지방검찰청 강경지청에서 1년 2개월 동안 근무를 했다. 1986년 5월 대구지방검찰청으로 발령이 났다. 강경은 충청남도로서 그렇게 낯선 곳이 아니었다. 고등학교 동문들도 있었다. 대구는 그야말로 완전히 낯선 타향이었다. 아무런 연고도 없었다.

 

나는 강경지청에서 법무부 가기를 희망했다. 전임자인 이상률 검사님이 강경지청 근무를 마치고, 곧 바로 법무부로 발령이 났기 때문이었다. 나도 똑 같이 될 수 있을 거라고 희망을 가졌다. 그런데 인사발표가 나고 보니 대구지검이었다. 무척 실망했다.

 

공무원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인사발령장 하나로 전국을 돌아다녀야 한다. 인사권은 무서운 칼자루다. 당시만 해도 검사가 인사발령이 나면, 지역 유지들과 공무원들이 찾아와서 송별인사를 나누었다. 많은 회식 자리가 마련된다. 그런데도 몹시 서운했다. 1년 2개월밖에 안 되었지만, 나름대로 많은 사람들을 알게 되었고 논산과 부여, 연무대를 많이 돌아다녔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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