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송무부와 공판부에서 근무하다
대학교에 들어갔을 때 고향 사람들과 잣나무 징발에 대한 국가배상을 청구하러 돌아다녔다. 국방부 배상담당부서나 법원, 변호사 사무실 등을 다녔다. 고향 사람들이 경비를 공동으로 거둬 소송을 했다. 나도 법대 1학년생이었기 때문에 고향 사람들과 함께 다녔다.
고향 사람들은 내가 서울 법대에 다닌다고 하니까 법을 많이 아는 것으로 알고 여러 가지를 주문했다. 사건경위서와 탄원서를 작성하라고 했다. 나름대로는 끙끙대고 썼지만 지금 다시 보니 얼마나 유치하고 수준이 낮은 것이었는지 웃음이 난다.
당시 내가 느낀 것은 법원이고 변호사 사무실이고 그곳에서 근무하는 사람들이 주는 거부감이었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타입의 비인간적인 사람들이었다. 시간이 흘러가니 내가 그런 사람들 속에서 생활해야 하는 입장이 되었다. 다른 사람들이 나중에 나를 보게 되면 그런 분위기에 물들은 똑 같은 사람으로 보게 될까봐 걱정이 되었다. 그런데 나도 모르게 시간이 가면서 점점 그렇게 변해가고 있었다.
1982년 12월이 되었다. 연말이 되면 검사실은 더 바빠진다. 연말에 미제 사건을 처리해야 하기 때문이다. 연말에는 이런 저런 모임에 참석하다 보면 자연히 술도 마시게 되고 시간을 많이 뺏긴다. 몸은 상당히 피곤해 진다. 거의 매일 사건 기록을 집에 가지고 와서 밤늦게까지 검토하고 결정문을 작성해야 했다.
1983년이 되었다. 검사 생활 4개월이 지나니 업무에 대해서는 처음 보다 많이 익숙해졌다. 사건 처리도 빨라지고 점점 중요한 사건을 배당 받게 되었다. 처음에는 한 달에 200건 정도 배당되었다. 정말 격무였다. 거의 매일 야근을 하고 기록을 집에 싸들고 다녔다.
마음은 즐거웠고 직접 내 이름으로 사건처리를 한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고생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혹시 실수하여 억울한 사람을 재판에 회부하거나, 진짜 법을 위반한 악질적인 범인을 처벌하지 못하는 일이 있을까 걱정했다.
사건처리에는 매우 신중한 태도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 구속되어 오는 사람들 중에 특히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이 있으면 가급적 그 사람들의 딱한 사정을 들어주느라고 시간을 많이 보냈다. 그러다 보니 다른 검사보다 사건 처리는 늦어졌다. 그래도 나는 개의치 않았다. 사건을 빨리 처리하는 것보다는 철저하게 조사하고 당사자의 변명이나 주장을 충분하게 들어주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8개월 쯤 지나 송무부로 부배치가 바뀌었다. 유순석 부장님, 김각영 검사님, 최연희 검사님과 함께 일했다. 부장 아래 검사는 세명이었다.
송무부에서는 국가소송수행을 하고 소송수행자를 지휘하는 임무를 담당했다. 서울지검에는 중요한 국가소송사건이 많이 있었다. 생소한 업무를 처음 맡아 자료를 찾아 업무를 익히느라고 고생을 했다.
국가소송수행자 교육 계획을 세우고 교육 자료를 만들기 위해 한 달 가까이 야근을 했다. 선배 검사들로부터 배우는 것이 많았다. 김각영 검사님은 대전고등학교 9년 선배인데, 나중에 서울중앙지검장, 검찰총장까지 지냈다. 최연희 검사님은 국회로 진출하여 국회의원이 되었다.
4개월간의 송무부 근무가 끝난 후 공판부로 배치되었다. 공판실에서는 실장과 검사 6명이 커다란 방 하나에서 같이 근무하였다. 대부분 법정에 공판관여를 하러 들어갔다. 다른 검사들이 수사하여 재판에 회부한 사건에 대한 공소유지를 전담하는 업무였다. 법정에 들어가 재판을 하면서 또 다른 경험을 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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