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운명 ③

 

점심 식사를 마친 정현은 잠시 여유를 가지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금요일 오후였다. 아무리 바쁜 사무실이라도 금요일 오후가 되면 달랐다. 업무를 대체로 정리해 놓기 때문에 마음이 느긋해진다. 토요일과 일요일, 이틀간 휴식을 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긴 휴식의 앞에서 느끼는 편안함이다.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졌다. 사람들은 급한 걸음으로 비를 피하려고 애쓰고 있었다. 우산 하나의 차이가 그런 것이다.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은 그렇게 다르다. 조급함과 여유로움이 극명하게 대비되고 있다.

 

우산 하나로 빗속을 즐기면서 걸을 수 있는데, 그렇지 않은 사람은 황급한 걸음 속에서 비를 불편하게만 생각하고 무조건 피하려고 한다. 우산이 없어 비에 가까이 다가길 수 없는 것이다. 그 때문에 아무런 여유도 가지지 못하고 쫓겨야 한다.

 

우산은 사실 인간이 만들어낸 초보적인 단계의 기술이다. 자연과 싸우는 무기다. 우산은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일차적으로 막아준다. 물론 완벽하게 빗물을 막는 것은 아니지만, 일단 아쉬운대로 머리카락을 젖지 않게 하고, 눈에 빗물이 들어가지 않게 막아준다. 그러면서 빗속에서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게 해준다.

 

원시인들은 우산을 생각하지 못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초원에서 모든 동물들은 우산이라는 존재를 모른다. 비가 오면 일단 피한다. 동굴 속으로 들어가거나, 나무 숲 속에서 가만히 있는다. 아니면 초원에서 그냥 비를 맞는다. 폭풍이 몰아쳐도 마찬가지다.

 

인간만이 우산을 이용하는 유일한 존재다. 비를 막으려는 것이다. 비에서 자신의 몸과 옷을 젖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인간은 우산을 사용함으로써 비의 촉감을 상실해버렸다. 비를 맞아 머리로부터 아래로 흘러내리는 비의 그 은은한 감각을 잊어버리고 딱딱한 갑집 속으로 자신의 피부를 감추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다. 필요할 때 없어서는 안 될 존재 하나 때문에 매우 고통스럽게 될 수 있다. 있어야 할 자리에 그 누군가가 없는 경우 삶은 망가지고 무질서하게 된다. 행복과 불행이 여기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우산이 없다고 해서 당장 불편한 것은 있지만, 우산이 없다는 이유로 반드시 불행한 것은 아니다. 옷을 비릴 셈 잡고 비를 맞으며 천천히 비의 감촉을 느끼고, 비를 맞는 기분을 맛보는 것도 괜찮은 일이다.

 

언젠가 정현은 혼자 비를 맞으며 남산 공원을 걸은 적이 있었다. 일부러 비를 맞으러 간 것은 아니었다. 혼자 답답해서 바람을 쐬러 남산에 갔는데 도중에 소나기가 쏟아졌다. 우산은 없었다. 하지만 소나기를 피하지 않고 그냥 걸었다. 남산의 북측길은 차가 다니지 않는 길이다. 30분 넘게 천천히 걸었다.

 

소나기를 맞고, 머리도 젖고 옷도 다 젖었다. 나뭇잎을 거쳐 떨어지는 빗물은 특이한 소리를 내고 있었다. 비를 맞으며 ‘rain'에 대해 생각해 보고, 자연에 대해, 인생에 대해, 그리고 사랑에 대해 많은 것을 떠올린 적이 있다. 가끔 비가 올 때면 그때의 아름답던 기억을 떠올려 본다.

 


'작은 운명'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작은 운명 ⑥  (0) 2018.08.08
작은 운명 ⑤  (0) 2018.08.07
작은 운명 ④  (0) 2018.08.06
작은 운명 ②  (0) 2018.07.27
작은 운명 ①  (0) 2018.07.26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