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운명 ⑥
학기말 시험을 앞두고 정현은 편지를 썼다.
“유미 씨에게!
우리가 만난 지도 벌써 두 달이 넘었어요.
그동안 만나면서 서로를 많이 알게 되었고, 내 마음이 유미씨에게 많이 끌렸던 것이 사실이예요.
그러나 지금 내 입장은 힘든 공부를 해야 하고 정신집중을 해야 할 때라고 생각해요. 당분간 만남을 미뤘다가 다시 연락할 게요.
이해해 주기 바래요.”
정현은 편지를 보낸 후 며칠 동안 무척 괴로워했다. 어두운 혼돈 속에서 뒹굴고 있었다. 편지를 보낸 것 자체를 후회했다. 공부에 대한 강박관념과 유미에 대한 애정이 뒤섞여 밤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렇다고 유미와의 관계를 원활하게 유지하면서 공부를 할 수 있는 자신도 없었다. 그건 지방에서 올라와 어려운 공부를 하고 있는 입장에서 당연한 것이었다.
정현은 친구들과 술을 마시러 다녔다. 학교 부근에 있는 막걸리집에 자주 다녔다. 안주는 파전에다 김치가 고작이었다. 주전자에 담겨져 나오는 막걸리는 한국적 향수를 지니고 있다. 시골에서 쌀로 담그는 막걸리는 민속주로서 그야말로 한국인의 땀과 애환이 섞여 있다. 막걸리집에 가면 구슬픈 국악가락이 흘러나왔다.
정현은 막걸리를 마실 때마다 자신이 한국에서 태어난 한국인이고 한국인의 피가 뜨거움을 느낄 수 있었다. 대학 시절에 막걸리를 많이 마셔서 그런지 정현은 나이가 들은 지금에도 양주 보다는 막걸리를 좋아했다. 막걸리를 마실 때 느껴지는 그 특유한 토속적인 맛과 분위기는 양주와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정현은 대학생으로서 갈림길에 있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사실 돌이켜 생각하면 그렇게 심각한 문제도 아닌데 당시로서는 아주 심각한, 마치 자신의 운명을 결정할 것 같이 중요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었다.
친구들과 상의할 성질도 아니었다. 친구들에게 그런 문제를 꺼내면 쓸데 없는 일을 가지고 고민한다고 가볍게 웃어넘기거나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 진지하지 못한 답변이 나올 것이 뻔했다. 정현은 혼자 고민했다. 보름이 지난 다음, 정현은 유미로부터 편지를 받았다. 떨리는 마음으로 편지를 뜯었다.
“정현씨에게!
지금은 새벽이예요.
정현씨 못지않게 저도 많은 아픔이 있어요.
그러나 정현씨의 앞날을 위해 참을게요.
그리고 기도할게요.
열심히 공부하세요.”
편지는 떨리는 손으로 쓰여져 있었다. 글 속에는 정현을 위한 애정과 정현을 위해 기도하는 마음이 들어 있었다. 정현은 눈시울을 붉혔다. 창밖으로 둥근 달이 떠오르고 있었다. 달은 여성을 상징한다. 달이 마음껏 차오를 때는 여성이 에너지가 넘친다. 환한 달빛을 보자 유미의 가슴이 정현의 가슴을 푸근하게 감싸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