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운명 ⑤

 

유미를 만나면서 정현은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다. 책을 봐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길을 걸어도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냥 유미의 얼굴만 떠오르고, 둘이서 함께 했던 분위기에 젖을 뿐이었다.

 

한참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할 때였다. 도서관에서 밤낮 없이 법서를 붙잡고 씨름을 해야 할 때였다. 이성이 감성을 억눌러야 했던 시기에 우연히 만난 한 여자 때문에 정현은 이성을 완전히 상실해 버렸다.

 

왜 그렇게 유미가 좋았는지 모른다. 사실 지금도 잘 모르고 있다. 다만, 그때는 유미가 세상의 전부였다. 물질이나 출세에 대한 욕망도 아무 의미도 없었다. 그건 너무 막연한 개념이어서 그랬는지 모른다.

 

유미와의 관계는 지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었고 보석처럼 빛나는 영원이었다. 밥을 먹지 않아도 배가 고프지 않았다. 날씨도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다. 밝으면 밝은 대로 흐리면 흐린 대로 정현의 감수성은 예민하게 발휘되었다.

 

그렇게 유미와의 만남은 시작되었고, 계속되었다. 처음에는 유미와 일주일에 한번씩 만나기로 했다. 만나면 식사를 하고 차를 마셨다. 같이 걸었다. 매우 단조로운 만남이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그 의미는 달라졌다.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가 좁혀졌다.

 

사람 사이의 간격이란 그런 것이다. 비슷한 공간에 살아도 남남인 관계에서는 거리가 아주 멀다. 지구 끝에 있는 사람보다도 더 멀다. 미국에 살고 있어도 가까운 사람과의 거리는 멀다고 할 수 없다.

 

옆집에 사는 사람도 전혀 인사도 없고 왕래를 하지 않으면 그 거리는 이루 측량할 수 없을 정도로 멀다. 아마 지구에서 달까지의 거리보다도 더 멀지 모른다.

 

‘멀게 느껴지는 사람!’ 같은 집에서 살고 있는 부부도 그런 경우가 있다. 특히 미워하거나 정이 없이 사는 부부는 정말 먼 사이다.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은 비록 군대에 가 있어도 늘 곁에 있다. ‘가깝게 느껴지는 사람!’ 바로 사랑과 애정, 관심과 배려는 두 사람 사이의 관계를 아주 밀착시킨다.

 

만남이 계속되면서 두 사람 사이의 거리는 급속하게 가까워진다. 허물이 없어지고 벽이 무너져 버린다. 함께 있으면 편안하고 좋은 기분이 느껴진다. 헤어지면 또 보고 싶다. 머리속은 달콤함과 야릇함으로 가득 채워진다.

 

자신의 존재가 갑자기 부풀어 진다. 세상의 아름다움이 모두 자신의 체내로 들어온다. 정신적 거리가 가까워지면 육체적 거리도 가까워진다. 그러나 두 사람 사이에는 지켜야 할 선이 분명히 존재하고 있었다.

 

시간이 가면서 정현은 무한한 애정을 느끼면서도 자신을 절제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혔다. 자신이 목표로 한 사법시험 준비에 소홀해질지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에 마음을 자꾸 닫게 되었다. 유미 역시 이런 정현의 입장을 이해하려다 보니, 마음이 더 이상 열리지 않았다. 두 사람은 그런 상황을 가슴 아프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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