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운명 ④
정현은 전화를 기다리고 있었다. 유미와 함께 저녁을 먹기로 했던 것이다. 서로가 바쁘기 때문에 사전에 전화로 확인을 한 다음 약속 시간과 장소를 정하기로 했다. 금요일 오후에 유미가 먼저 전화를 하기로 했다.
정현은 저녁 식사를 어디에서 할까 생각하고 있었다. 널리 공개되지 않은 장소로서 분위기 있는 곳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호텔이란 아는 사람을 만날 소지가 많았다. 그렇다고 유미를 만나는데 아무 식당이나 갈 수도 없었다. 교외로 나가자니 시간이 많이 걸렸다. 전화가 오면 유미에게 장소를 정하라고 할 생각이었다.
퇴근 시간이 다 되도록 전화는 오지 않았다. 정현은 기다리다가 하는 수 없이 전화를 걸었다. 신호는 가는데 전화는 꺼져 있었다. 궁금하지만 하는 수 없었다. 정현은 차를 타고 나섰다. 혼자서 드라이브를 하기 위해서였다. 라디오에서는 아베마리아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집에 들어가려는데 전화가 왔다.
"아무래도 떠나야겠어요."
“아니, 또 왜 그래요."
"이젠 더 이상 못 참겠어요."
"그러지 말고 만나서 얘기해요."
"오늘은 안돼요. 미안해요."
전화는 끊어졌다. 다시 전화를 걸었으나 더 이상 전화를 받지 않았다. 정현은 답답한 심정으로 집에 들어갔다. 어떻게 달래야 할까? 최근에 부쩍 마음이 흔들리는 걸 느꼈다. 서울에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몇달 전부터 시애틀에 살고 있는 유미의 친한 친구가 미국으로 들어 오라는 권유를 하고 있었다. 유미는 흔들리고 있었다. 정현 곁을 떠나려고 마음 먹는 것 같았다. 유미가 떠난 후의 공백이 두려웠다.
집에 들어와 침대에 누웠다. 보름달이라 달빛이 환하게 창가를 비추고 있었다. 유미를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 대학교 3학년 때였다. 4월이었다. 친구가 저녁을 먹자고 해서 따라 나갔다. 친구는 식사 후에 차를 한잔 하자고 했다.
둘이서 차를 마시고 있는데 여자 2명이 들어왔다. 정현은 그 여자들에게 눈길이 쏠렸다. 외향적인 성격의 친구는 가서 말을 걸더니 합석을 하도록 했다. 자연스럽게 차를 마시게 되었다. 친구가 무어라고 말을 했는지는 모른다. 그냥 넷이서 차를 마시며 재미있게 대화를 했다.
젊은 시절의 낭만이었다. 모르는 사람들이 우연히 만나 함께 차를 마시고 공통의 화제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순수함 때문이었다. 헤어지면서 친구는 여학생들의 연락처를 알아놓았다. 다음에 또 만날 수 있는 기회를 만든 것이다.
일주일 후에 정현과 친구는 여학생들과 만나 저녁식사를 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친구가 되었다. 유미는 이렇게 만나게 되었다. 정현은 처음부터 유미에게 호감을 가졌다. 왜 그렇게 좋아졌는지는 모른다. 별로 말이 없는 유미에게 정현은 많은 말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