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운명 ⑦
9월이 다 지나가는 가을 저녁 정현은 유미의 피아노연주회에 참석했다. 연주회는 유미가 다니고 있는 대학교 콘서트홀에서 열렸다. 정현은 친구와 함께 연주회에 갔다. 연주회가 열린다는 소식을 들은 정현은 며칠 동안 마음이 설렜다.
우선은 피아노를 치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그리고 상상했다. 어떤 모습으로 어떻게 피아노를 칠까? 너무 아름다울 것 같았다. 마침내 기다리던 날이 왔다. 학교에서 수업을 들으면서도 정현에게는 교수님의 강의도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 빨리 시간이 가기만을 학수고대했다.
어떤 옷을 입고 갈까도 고민했다. 평소 옷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고 살았지만, 이날만은 좀 차려입고 가고 싶었다. 옷도 입어보던 사람이 입는 것이지 아무나 입는다고 맵시가 나는 건 아니라는 사실은 잘 알고 있었다. 그래도 나름대로 애써 골라 입었다. 구두도 깨끗하게 닦고, 머리도 깔끔하게 빗었다. 난생 처음 사보는 장미꽃을 들고 학교로 갔다.
학교 캠퍼스에는 가을의 정취가 무르익어가고 있었다. 학교 잔디밭에는 학생들이 앉아 있었다. 연주를 시작하기 전에 유미를 잠깐 만날 수 있었다. 공연장 뒤편에서 공연준비에 바쁜 유미는 환한 미소로 정현을 맞아주었다. 다소 쑥스럽기는 했지만, 그래도 정현은 당당한 모습으로 말을 건넸다.
몇 달간의 공백이 있었지만, 다시 만난 두 사람은 아주 오래된 사이처럼 느껴졌다. 천생연분이란 게 이런 것일까? 정현은 마음 속으로 생각했다. 자신은 유미를 만나지 않고 공부를 하려고 노력하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공부가 잘 된 것도 아니었다.
늘 머리 속으로는 유미를 생각하면서도 공부에 대한 중압감 때문에 제대로 데이트를 못할 뿐이었다. 그러던 중 유미의 친구를 통해, 유미가 연주회에 참석한다는 소문을 들었다. 혼자 갈 용기는 나지 않았고, 가야할 지 말아야 할지 고심하다가 끝내 친구에게 부탁해서 함께 갔던 것이다.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유미가 무대에 나타났다. 세련된 의상도 그랬지만, 화장을 해서 그런지 유미는 아주 멋있어 보였다. 유미는 두 곡을 쳤다. 정현은 눈을 감고 그 피아노 연주를 들었다. 연주회가 끝나고 정현과 유미는 따로 맥주를 마시는 시간을 가졌다.
“너무 연주를 잘 했어요. 정말 훌륭해요.”
“고마워요. 이렇게 올 줄 몰랐어요.”
“많이 보고 싶었어요. 공부한다고 참으려고 했지만 잘 안 되더라고요.”
“어려운 공부하고 있어 저도 참고 있었어요.”
약간 술에 취한 상태에서 정현과 유미는 나란히 걸었다. 별이 빛나고 있었다. 아까 들었던 유미의 피아노 소리가 별에서 쏟아져 내리는 것 같았다. 정현은 행복했다. 다시 만나 함께 걷고 있다는 사실이 꿈만 같았다. 유미가 아직도 자기를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더 확인하고 싶었다.
“조금만 기다려줘요.”
“...”
유미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유미도 답답했다. 어떻게 해야 할까? 그건 정현과 유미 모두에게 똑 같이 어려운 문제였다. 정현은 집까지 바래다 주고 밤 12시가 다 되어 돌아왔다. 다시 만날 약속을 하지 못했던 건 자신이 없어서였다. 연주회에서 본 유미의 모습에 심리적으로 눌렸던 탓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