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운명 ⑯

 

정현은 윤석을 먼저 보낸 다음 호텔 로비라운지로 가서 커피를 시켰다. 역시 창가로 자리를 잡고 어두워진 밤하늘과 바깥 풍경을 보고 있었다. 술기운이 강하게 솟구쳤다.

 

그래도 정신은 아주 또렷했다. 정현은 다시 옛날로 돌아가 유미와 지냈던 시간을 떠올렸다. 로비라운지 중앙에 그랜드 피아노에서는 어떤 사람이 월광소나타를 들려주고 있었다. 피아노를 치는 여자의 모습이 유미와 오버랩되고 있었다.

 

정현은 시험공부를 하면서도 유미와 가끔 만났다. 만나면 특별히 하는 일은 없었다. 둘이서 남산으로 가서 걸었다. 걸으면서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두 사람은 대화를 통해 서로에 대해 너무 많은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면서 서로를 위로하고 공감했다. 같이 있다가 헤어지면 또 보고 싶었다. 정현은 자신이 마치 피아노를 전공하는 사람처럼 피아노에 몰입했고, 유미 또한 자신이 고시공부를 하는 것처럼 고시생을 이해했다.

 

정현은 자신은 어떠한 일이 있어도 시험에 붙어야 한다는 의지를 강하게 내비쳤고, 유미는 꼭 그러지 않아도 되는 것 아니냐고 했다. 시험은 상대적인 것이기 때문에 운이 좋아야 붙는 것이며, 시험에 너무 목숨을 거는 것은 좋지 않다고 말했다.

 

그러나 정현은 나름대로는 열심히 공부했지만, 더 열심히 한 사람들에게 밀려 졸업할 때까지 1차 시험에도 합격하지 못하고 실업자가 되었다. 병역을 연기하기 위해 부득이 어려운 여건임에도 불구하고 대학원에 들어갔다.

 

그래서 2년 동안의 배수진을 치고 다시 공부를 하기로 했다. 2년 안에 시험에 붙지 못하면 그때는 하는 수 없이 군대를 가야하고, 제대를 한 다음에는 시험을 포기하고 회사에 취직을 해야 할 상황이었다.

 

대학교를 졸업한 다음 부활절 바로 전날 정현은 유미를 만났다. 그리고 두 사람은 함께 술을 마셨다. 술에 취한 정현은 유미에게 자신의 초라함을 솔직하게 고백했다. 몇 명의 친구들은 이미 시험에 붙었는데, 자신은 1차 시험도 떨어진 상황이며, 갈수록 시험에 대한 자신이 없어진다고 했다.

 

그래서 유미에게도 자신이 없고, 일단 헤어지자고 했다. 그리고 좋은 사람을 만나라고 했다. 그러면서 눈물을 흘렸다. 유미도 따라서 울고 있었다. 유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고개를 끄덕이지도 않았다. 몇 시간이 지난 후 정현이 술에서 깨어보니, 어느 작은 모텔방이었다.

 

정신을 차리고 불을 켰더니 유미는 쇼파에 앉아 자고 있었다. 술 때문에 속도 아프고 머리도 아팠다. 정현은 깜짝 놀랐다. 미안했다. 서둘러 유미를 데리고 밖으로 나왔다. 아직 새벽이었다. 두 사람은 차가운 공기를 맞으며 한참 동안 걸었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정현은 지나가는 택시를 잡아서 유미를 집까지 데려다주었다. 유미는 차에서 내릴 때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냥 굳은 표정으로 내려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집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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