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운명 (14)
국홍의 강간사건은 변호사가 특별한 일을 하지 않고 있는 사이에 담당검사에 의해서 재판에 넘겨졌다. 공판기일이 잡혔다. 국홍은 구치소에서 있으면서 같은 감방에 있는 인생 선배들로부터 많은 조언을 들었다.
“강간사건은 빨리 합의를 해야 하는 거요. 여자가 강간을 당했으면, 그때부터 강간 당한 여자가 검사가 되는 거야. 그 여자가 칼자루를 지게 되는 거지. 변호사가 무슨 소용이 있어? 변호사는 돈만 받아먹고 별로 하는 일이 없어. 합의를 하지 않으면 절대로 나갈 수가 없어. 생각해 봐요. 강간을 당한 여자가 경찰이나 검사, 그리고 판사에게 자신이 강간을 당했으니까, 강간한 남자 처벌해 달라고 울고불고 하는데, 어떤 공무원이 강간한 여자 무시하고 강간한 놈 풀어주겠어? 당신 같으면 그렇게 무대포로 풀어주겠어. 그러니까 빨리 합의하는 게 신상에 좋아. 그리고 판사 입장에서 볼 때 국선변호사도 아니고, 비싼 돈 주고 사선변호사 선임하면서 정작 피해자에게는 돈 한푼 안주고 배짱으로 나온다고 하면 얼마나 괘씸하게 보겠어?”
국홍은 변호사에게 사기를 당했다고 생각했다. 그러고 생각해보니 구치소 벽에 많은 낙서가 있는데, 그중 상당수가 어떤 변호사가 악덕이다. 나쁘다, 돈만 받아먹고 자연뽕만 기다린다는 등의 낙서가 있었다.
감방에 있는 사람들은 이미 몇 차례 감방에서 오랜 세월을 보내면서 수많은 형사사건의 진행상황을 보고 듣고, 같이 고민하고 토의를 했던 사람들이다. 그 사람들은 직접 현장에서 몸으로 뛰면서 우리나라 재판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몸소 체험한 유경험자들이다.
더군다나 7명 이상의 집단합의부에서 판단을 내린다. 같은 감방에 있는 전과 많은 사람이 좌장이 되고, 전과가 적은 죄수들은 배석판사 역할을 한다. 국홍은 먼저 자신이 한 일, 조사받은 사항, 재판에 넘어간 공소장에 기재된 공소사실을 공개적으로 설명한다.
그러면 모두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그 사건에 대해 의견을 낸다. 대개 비슷하다. 그러나 의견이 갈릴 때는 역시 전과가 많은 고참이 유권해석을 내린다.
그런데 이상하게 이들이 내린 결론과 실제 판사들이 선고하는 형량이나 집행유예 등의 결과는 90% 이상 적중한다. 갤럽이나 리얼 미터 같은 여론조사기관에서 하는 여론조사결과보다 훨씬 높은 정확도를 자랑하는 것이다. “저는 합의만 되면 나갈 수 있나요?”
“글세. 그건 장담 못해! 요새 강간죄 같은 성폭력범죄에 대한 판사들의 형량이 아주 높아졌어. 중요한 건 피해자가 합의를 해주고, 진정서나 탄원서 같은 것을 얼마나 잘 써주느냐에 달려있어. 그러면 자네는 단순강간죄고, 칼이나 위험한 물건 가지고 강간한 것이 아니고, 또 전과 없고, 가정 있고, 직업 있고 하니까 잘 하면 집행유예를 풀어줄 거야. 그런데 여전히 복병은 남아있어. 이상한 판사 만나면 골로 가는 거야. 판사 중에는 유독 성범죄를 증오하고 미워하고 엄벌하자는 사람도 있어. 그러니까 그런 건 운에 맡겨. 고민해도 아무 소용 없는 거야.”
그러면서도 재소자들은 국홍을 정신 나간 사람으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어떤 사람은 노골적으로 국홍에게 말해주었다.
“당신은 정말 한심한 사람이야. 그래 고아 출신이라면서! 그리고 부인도 같은 고아 출신이라면서, 그래 고생해서 술집 차렸으면 열심히 일을 해서 부부가 잘 살아야지, 그래 술에 취해 젊은 여자 배위에 한번 올라가서 그짓 하면 그게 뭐 좋다고, 이렇게 패가망신하는 거야? 남들은 먹고 살기 힘들어서 남의 물건 말없이 들고 오거나, 약간 거짓말하고 돈 받아 생활비로 쓰다가 절도나 사기꾼으로 몰려서 감방에 오는데, 자네는 배가 불러서 그런 성(性)스러운 일을 하셨나? 그 나이면 성(聖)스럽게 성경책을 읽어야지. 나이가 40살이면 불혹(不惑)이라고 해서, 미혹되지 않는다고 했는데, 자네는 나이를 똥구멍으로 잘못 먹었나 봐! 정신 차려 이 사람아! 그리고 자네가 잘못해서 징역 사는 건 샘통이지만, 고아 출신인 자네 부인은 얼마나 불쌍해? 나가면 잘 해줘! 그리고 자네는 빨리 나가야 해. 내가 교도소에서 오래 있다가 보니까, 젊은 부인 밖에 두고 감방에 들어오면 그 젊은 부인을 건달들이 건드려서 몸을 빼앗는 경우가 많아. 그리고 마누라 입장에서도 남편 놈이 다른 여자 강간하다가 들어가 있으니까 남편이 더럽게 생각도 들고, 또 속담에 이런 말 있잖아? ”홧김에 서방질 한다‘고! 알았지?“
국홍은 말없이 이 분의 연설을 경청하고 있었다. 너무 똑똑하고 지혜로왔다. 한 마디도 틀린 것이 없었다. 국홍은 속으로 생각했다.
’이 어르신네는 틀림없이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했는데, 운이 따르지 않아 고시에 붙지 못한 것 같아. 그리고 자기 보다 머리 나쁘고 성적이 좋지 않는 친구들이 고시에 붙었다고 잘난 척하는 걸 보고 홧김에 죄를 짓고 와 계신 모양이다. 아무튼 시키는대로 해야겠다. 잘못 했다가는 변호사에게 속아서 징역도 살고, 사랑하는 복자도 빼앗기게 생겼다.”
국홍은 눈물을 흐렸다. 그랬더니 그 도사는 “홧김에 서방질한다’는 말은 아주 중요한 속담이야. 이 말은 무조건 여자가 서방질 한다는 뜻이 아니라, 원래 화를 참지 못하여 차마 못할 짓을 하게 됨을 이르는 말이야. 인간 심리를 짧은 말에 함축해 놓은 세계적으로 으뜸가는 한국 속담이야. 일본에서는, <腹いせに不貞ふていをはたらく>라고 하거나, <憤いきどおりのあまり分別ふんべつを失うしなう>라고 해. 그렇지만, 요새 우리 사회에서는 반일분위기가 있어서 일본 상품도 불매운동을 하고 있으니까, 밖에 나가서 괜히 잘난 척하고 일본말 떠벌리지마. 얻어 터지는 수가 있어.”
국홍은 갈수록 신비스러웠다. 그 어르신은 마치 사이비종교단체 교주나 회장 같았다. 어떻게 일본말까지 거침 없이 할 수 있다는 말인가? 발음도 마치 일본 본토 사람 같았다. 갑자기 혀가 짧은 사람처럼, 특히 한국식 받침은 절대로 발음하지 못하는 드우웅신처럼 보였다.
“아니 선생님께서는 언제 일본말을 배우셨습니까? 존경스럽습니다.” 그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다가, 갑자기 슬픈 표정을 지었다. “나는 젊었을 때 일본 술집에서 오래 일을 했던 제주도 출신 여자와 연애를 했어. 그 여자는 일본에서 돈 많은 노인과 동거를 하면서 돈을 많이 받아가지고 한국으로 도망을 왔어. 그때 나는 그 여자를 보호해주기 위해서 일년간 동거를 했어. 그런데 이상하게 그여자는 한국에서 일본으로 스무살 때 건너갔다고 하는데, 한국에 와서는 한국말을 전혀 하지 않았어. 한국말은 알아듣는 것 같기는 한 대, 절대로 한국말은 하지 않았어. 나와 치고받고 싸워도 아프다는 말을 일본말로 했어. <いたい, いたい> 이렇게 하는 거야. 그래서 내가 하는 수 없이 일본말을 독학으로 마스터했어. 나중에는 나도 일본말만 그 여자에게 하게 되었는데, 다만 욕을 할 때나 잠자리에서 흥분했을 때에는 순식간에 한국말이 튀어나오는 건 어쩔 수 없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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