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은 시작은 곧 고통으로 이어지고 방황의 출발이다

 

그렇게 유미와의 만남은 시작되었고, 계속되었다. 처음에는 유미와 일주일에 한 번씩 만나기로 했다. 만나면 식사를 하고 차를 마셨다. 같이 걸었다. 매우 단조로운 만남이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그 의미는 달라졌다.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가 좁혀졌다. 사람 사이의 간격이란 그런 것이다. 비슷한 공간에 살아도 남남인 관계에서는 거리가 멀다. 지구 끝에 있는 사람보다도 더 멀다. 미국에 살고 있어도 가까운 사람과의 거리는 멀다고 할 수 없다.

 

옆집에 사는 사람도 전혀 인사도 없고 왕래를 하지 않으면 그 거리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멀다. 지구에서 달까지의 거리보다도 더 멀다. ‘멀게 느껴지는 사람!’ 같은 집에 사는 부부도 그런 경우가 있다. 미워하거나 정이 없는 부부는 정말 먼 사이다. 사랑하는 사람은 비록 군대에 가 있어도 늘 곁에 있다. ‘가깝게 느껴지는 사람!’ 바로 사랑과 애정, 관심과 배려는 두 사람 관계를 밀착시킨다.

 

만남이 계속되면서 두 사람 사이의 거리는 급속하게 가까워진다. 허물이 없어지고 벽이 무너진다. 함께 있으면 편안하고 좋은 기분이 느껴진다. 헤어지면 또 보고 싶다. 머리속은 달콤함과 야릇함으로 가득 채워진다. 자신의 존재가 갑자기 부풀어진다. 세상의 아름다움이 모두 체내로 들어온다. 정신적 거리가 가까워지면 육체적 거리도 가까워진다.

 

그러나 두 사람 사이에는 지켜야 할 선이 분명히 존재하고 있었다. 시간이 가면서 정현은 무한한 애정을 느끼면서도 자신을 절제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혔다. 시험 준비에 소홀해질지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에 자꾸 마음을 닫게 되었다. 유미 역시 이런 정현의 입장을 이해하려다 보니, 마음이 더 이상 열리지 않았다. 두 사람은 그런 상황을 가슴 아프게 생각했다. 학기말 시험을 끝내고 정현은 편지를 썼다.

 

 

유미 씨에게! 우리가 만난 지도 벌써 두 달이 넘었어요. 그동안 만나면서 서로를 많이 알게 되었고, 내 마음이 유미 씨에게 많이 끌렸던 것도 사실이예요. 그러나 지금은 공부를 해야 하고 정신집중을 해야 할 때라고 생각해요. 당분간 만남을 미뤘다가 다시 연락할 게요. 이해해 주기 바래요.”

 

정현은 편지를 보낸 후 며칠 동안 무척 괴로워했다. 어두운 혼돈 속에서 뒹굴고 있었다. 편지를 보낸 것 자체를 후회했다. 공부에 대한 강박관념과 유미에 대한 애정이 뒤섞여 밤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렇다고 유미와의 관계를 원활하게 유지하면서 공부를 할 수 있는 자신도 없었다. 그건 지방에서 올라와 어려운 공부를 하고 있는 입장에서 당연한 것이었다.

 

정현은 친구들과 술을 마시러 다녔다. 학교 부근에 있는 막걸리집에 자주 다녔다. 안주는 파전에다 김치가 고작이었다. 주전자에 담겨져 나오는 막걸리는 한국적 향수를 지니고 있다. 시골에서 쌀로 담그는 막걸리는 민속주로서 그야말로 한국인의 땀과 애환이 섞여 있다. 막걸리집에 가면 구슬픈 국악가락이 흘러나온다.

 

정현은 막걸리를 마실 때마다 자신이 한국에서 태어난 한국 사람이고 한국인의 피가 뜨거움을 느낄 수 있었다. 대학원 시절에 막걸리를 많이 마셔서 그런지 정현은 나이가 들은 후에도 양주 보다는 막걸리를 좋아했다. 막걸리를 마실 때 느껴지는 그 특유한 토속적인 맛과 분위기는 양주와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정현은 로스쿨생으로서 갈림길에 있었다. 사실 돌이켜 생각하면 그렇게 심각한 문제도 아니었는데 당시로서는 아주 심각한, 마치 자신의 운명을 결정할 것 같이 중요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었다. 친구들과 상의할 성질도 아니었다. 그런 이야기를 꺼내면 쓸데없는 일을 가지고 고민한다고 가볍게 웃어넘기거나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 진지하지 못한 답변이 나올 것이 뻔했다. 그래서 혼자 고민했다. 보름이 지난 다음 편지를 받았다. 떨리는 마음으로 편지를 뜯었다.

 

지금은 새벽이예요. 정현 씨 못지않게 저도 많은 아픔이 있어요. 그러나 정현 씨의 앞날을 위해 참을게요. 그리고 기도할게요. 열심히 공부하세요.”

 

떨리는 손으로 쓰여져 있었다. 애정과 기도하는 마음이 들어 있었다. 눈시울을 붉혔다. 창밖으로 둥근 달이 떠오르고 있었다. 달은 여성을 상징한다. 달이 차오를 때는 여성의 에너지가 넘친다. 환한 달빛을 보자 유미의 가슴이 정현의 가슴을 푸근하게 감싸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10월이 다 지나가는 가을 저녁 피아노연주회에 참석했다. 유미가 다니는 대학교 콘서트홀에서 열렸다. 친구와 함께 연주회에 갔다. 연주회가 열린다는 소식을 들은 며칠 동안 마음이 설렜다. 피아노를 치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그리고 상상했다. 어떤 모습일까? 너무 아름다울 것 같았다.

 

마침내 기다리던 날이 왔다. 강의를 들으면서도 교수님의 말이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 빨리 시간이 가기만을 학수고대했다. 어떤 옷을 입고 갈까도 고민했다. 평소 옷에 신경쓰지 않고 살았지만, 이날만은 좀 차려입고 싶었다. 옷도 입어보던 사람이 입는 것이지, 아무나 입는다고 맵시가 나는 건 아니다. 그래도 나름대로 애써 골라 입었다. 구두도 깨끗하게 닦고, 머리도 깔끔하게 빗었다.

 

캠퍼스에는 가을의 정취가 한껏 무르익어가고 있었다. 잔디밭에는 군데군데 학생들이 앉아 있었다. 연주를 시작하기 전에 잠깐 만날 수 있었다. 공연 준비에 바쁜데도 유미는 환한 미소로 맞아주었다. 다소 쑥스럽기는 했지만, 정현은 당당한 모습으로 축하한다고 했다.

 

몇 달간의 공백이 있었지만, 다시 만난 두 사람은 아주 오래 된 사이처럼 느껴졌다. 천생연분이란 게 이런 것일까? 정현은 유미를 만나지 않고 공부를 하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공부가 잘 되는 것도 아니었다. 늘 머리속으로 생각하면서도 공부에 대한 중압감 때문에 데이트를 못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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