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적으로 어려운 현실이 젊은 시절의 낭만을 억압하다

 

마침내 유미가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무대에 나타났다. 세련된 의상도 그랬지만, 화장을 해서 그런지 아주 멋있어 보였다. 유미는 두 곡을 연주했다. 연주회가 끝난 다음 따로 맥주를 마시는 시간을 가졌다.

너무 잘 했어요. 정말 훌륭해요.”

고마워요. 이렇게 올 줄 몰랐어요.”

많이 보고 싶었어요. 참으려고 했지만 잘 안 되더라고요.”

 

술기운이 도는 상태에서 밖으로 나와 걸었다. 별이 빛나고 있었다. 유미의 피아노 소리가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정현은 행복했다. 다시 만나 함께 걷고 있다는 사실이 꿈만 같았다. 유미가 아직도 자기를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싶었다.

조금만 기다려줘요.”

“...”

 

유미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유미도 답답했다. 어떻게 해야 할까? 집까지 바래다주고 밤 12시가 다 되어 돌아왔다. 다시 만날 약속을 하지 못한 건 자신이 없어서였다. 연주회에서 본 유미 모습에 심리적으로 눌렸던 탓도 있었다. 시험공부를 하고 있는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연주회에 왔던 다른 남학생들의 여유 있는 모습 때문에 더 그랬는지 모른다. 유미가 정현의 환경에 대해 신경을 썼던 적은 없었다. 유미는 정현의 조용한 성격, 굳은 의지로 공부하고 있는 자세, 순수함 때문에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정현은 편지지에 써내려갔다.

 

오늘 그대에게서 진한 향기를 느낄 수 있었어요. 지금 이 시간 밤하늘의 별을 보면서, 피아노 치는 모습을 떠올리고 있어요. 피아노 선율은 하늘로 올라가 별에 닿아 별의 노래가 되어 내게로 돌아왔어요. 무슨 인연일까요? 우연히 만난 그대와 내가 저 하늘의 별까지 날아가 마음이 하나가 될 수 있음은 분명 무슨 까닭이 있을 거라고 믿어요. 내가 더 노력할 게요. 언젠가 자신 있는 모습으로 나타날 거예요. 나를 믿고 기다려 줘요? 또 연락할 게요. 안녕!”

 

편지 맨 끝에 무어라고 써야 좋을지 몰랐다. 사랑한다고 쓸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친구라는 명칭도 적당치 않았다. 그냥 이름을 쓰자니 너무 실체에 맞지 않았다. 그래서 생략했다. 끝부분을 생략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 너무 가슴 아팠다.

 

 

윤석이 대학교에 떨어져 재수하고 있을 때, 아버지는 빚을 내서 작은 건물 하나를 지었다. 40평의 땅에 3층이었다. 서울로 올라와 학원에 다니기 전까지는 아버지를 도와 건축 일을 도와주었다. 하루 종일 공사장에 나와서 심부름을 했다. 인부들은 정말 고생하고 있었다. 무거운 물건을 들어소 옮기고, 늘 땀을 뻘뻘 흘렸다.

 

건물이 완성되자 아버지는 1층과 2층은 세를 주었다. 3층으로 가족 모두가 이사했다. 어렵게 지내다가 작은 건물도 소유하고, 월세도 조금 받게 되자 가족들은 한숨 돌리게 되었다. 의대에 들어가 새로운 세계에 눈을 떴다.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하고, 의술로써 인류의 건강을 지키고, 평생을 봉사하겠다고 마음먹었다. 지방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에 올라오니 세상이 넓다는 것도 새삼스럽게 알게 되었다.

 

해부학과 같은 원서로 된 두꺼운 의학서적을 들고 다니면서, 자신이 아주 중요한 학문을 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고등학교 다닐 때 문제집이나 풀고 외우며 시험준비를 하던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고등학교 선생님들로부터 수업을 받다가 대학 교수님들로부터 강의를 듣는 것은 상당히 다른 기분이었다. 자유롭고 낭만적인 분위기에 젖어가면서도 열심히 의과대학 강의를 듣고 있었다.

 

지방에 계신 부모님 생각을 하면 항상 마음이 뭉클했다. 열심히 공부해서 호강시켜 드려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어려워진 가정 형편 때문에 서울에 올라와서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곧 바로 과외지도를 했다. 의대 공부 하랴, 과외지도 하랴, 눈코 뜰 새 없었지만, 자신이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받아들였다. 부유한 환경의 다른 학생들이 여유롭게 생활하는 것을 전혀 부러워하지 않았다.

 

의대 공부는 정말 힘들었다. 영어로 된 의학적 용어를 수없이 외워야했다. 겉으로 보이지 않는 사람의 신체 내부에 어떤 조직이 있고, 혈관이 어떻게 흐르고, 각 기관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알아야 했다. 신체 일부가 잘못되었을 때 어떤 증세가 나타나고 그에 대해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파악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았다. 지금까지 겉에서 눈과 코, , 손과 발, 가슴 등만 피상적으로 보았던 윤석에게 안으로 들어가 신체를 정밀하게 파악하는 것은 전혀 새로운 충격이었다.

 

밤을 새워 공부를 해도, 외워도 외워도 끝이 없었다.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윤석은 혼자 쓰는 원룸에서도 학교에서 실습용으로 나누어 준 뼈와 두개골 등을 가지고 와서 밤늦게까지 들여다보고 공부를 했다. 때로는 무섭기도 했다. 죽어서 마른 뼈가 되어 땅속에 묻히지도 못하고 학생들의 손에 손을 거쳐 학습용이 된 고인들이 누군지 궁금하기도 했다.

 

학교에는 해부용 사체를 처리하는 남자 직원이 한 사람 있었는데, 그 사람을 보면 무서운 생각이 들어 다른 길로 돌아가기도 했다. 그러나 의사가 되려면 이런 과정을 다 거쳐야 메스를 잡고 고통스러워 울부짖는 사람의 살을 베고 수술을 할 수 있다고 믿고 담대해지려고 노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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