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의 철학
저녁 시간에 청계산을 올랐다. 오후 5시부터 산행을 시작했다. 이젠 많이 다녀 완전히 낯이 익은 산이다. 올라가면서 어디가 어딘지 다 안다. 정말 좋은 날씨다. 가을은 우선 날씨가 좋아 마음에 든다. 반팔을 입은 상태에서 숲 속에 들어가니 그 시원함이 가슴 속까지 스며들어왔다.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바람! 그 바람 때문에 좋아지는 기분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살아있다는 것에 눈물이 날 정도였다. 살아서 이런 바람을 맞을 수 있음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바람은 내가 몸을 움직여 다가가여 진수를 맛볼 수 있는 것이었다. 바람과 내가 함께 움직여야 진정한 바람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고, 바람은 나에게 가을의 깊은 맛을 선사할 수 있는 것이었다.
내가 살아있고, 바람은 움직이고 있었다. 바람과 나는 서로가 동화되어 하나의 존재를 이루고 있었다. 비록 그것이 짧은 시간의 교감이라고 해도 나는 순간에서 영원으로 넘어가는 다리 위에 서 있었다. 바람과 나는 사랑을 하고 있었다.
해가 지면서 서서히 어두워지는 청계산은 묘한 운치를 지니고 있었다. 나무들은 점점 어둠 속에서 검은 물체로 변하고 있었다. 숲 속에는 고요가 흐르고 있었다. 풀벌레 소리조차 숨을 죽인 듯 했다.
나는 그 어두움과 정적에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어두운 숲은 나에게 긴장을 강요했고, 나는 긴장상태에서 조심스럽게 걸었다. 숲 속은 급속도로 어두워졌다. 나무들이 빛을 차단했였기 때문에 숲은 갑자기 어둠의 성으로 변하고 있었다.
그 어둠의 성에서 나는 삶의 진실을 찾아보려고 애썼다. Enya 의 May it be (아마도)라는 노래가 떠올랐다. “어둠이 내려 않을 때 당신의 마음은 진실하게 될 거예요.”(When darkness falls, your heart will be true.)라는 노래가사처럼 나는 어둠 속에서 진실해지려고 노력했다.
진실은 어둠 속에서 내 가슴 속에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나의 진실은 무척 애매모호한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실망했다. 내 진실의 애매모호함 때문에 답답함을 느꼈다. 그런 애매모호함이 결국 내 진실인 것을 깨닫고, 나는 더 이상의 진실을 추구하는 일을 포기했다.
가을이 깊어가면서 곧 떨어질 낙엽의 운명을 생각하면서, 짧은 인생에서 시간의 소중함을 새삼 느꼈다. 낙엽은 시간과 무슨 연관이 있을까? 왜 낙엽의 서글픔을 시간과 비교하고 있을까? 그것은 어리석은 일이었다. 낙엽은 낙엽 그 자체로서 존재하는 것이었다. 추상적인 시간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매봉까지 후랫시를 켜지 않고 그냥 올라갔다. 어둠을 더듬고 올라가는 것도 나름대로 묘미가 있었다. 몇몇 사람들도 그렇게 올라가고 있었다. 어두운 산길을 걸으니 바로 발앞만 보고 가야했다. 시야를 멀리 볼 수도 없을뿐 아니라, 멀리 보는 것은 위험했다. 발을 헛디디지 않도록 눈앞만 유심히 살펴봐야만 했다.
인생을 살면서도 때론 그런 시간이 있다. 멀리 생각할 여유 없이 바로 닥친 오늘과 내일까지만 신경을 쓰고 살아야만 할 때가 있는 것이다. 그럴 때는 다른 방법이 없다. 그냥 하루 하루 일만 생각하고 살아가는 것이 최선이다. 그렇지 않으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매봉까지 갔다가 내려올 때는 후래시를 켰다. 환한 불빛이 길을 인도하고 있었다. 정상 부근에서 바라본 보름달은 정말 둥그렇고 크게 보였다. 잠시 멍하니 서 있었다. 가을의 달밤이었다. 가을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가을밤에 달이 뜬 장면이었다. 그것은 가을의 클라이막스였다. 가을이라는 연극의 대단원이었다. 가을이 숨을 멎은 채 정지해 있었다.
저 달을 같은 시간에 보고 있는 사람들과는 달을 통해 텔레파시가 통할 것이라고 믿었다. 서로가 장소는 달라도 같은 달을 보면서 달에게 작은 소원을 빌면 달은 그것을 들어줄 것처럼 보였다. 달과 소원과 사랑은 사실 관념적인 관계일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은한 달빛을 보면서 사랑을 떠올리고, 작은 소망을 가벼보는 것은 역시 살아있는 사람들의 특권이었다.
내려오면서 산 속의 고요를 다시금 느꼈다. 산은 밤에도 살아있었다. 나무들이 숨을 쉬고 있었고, 가끔 벌레소리도 들렸다. 밑에는 계곡물소리도 작게 들려왔다. 바위들도 조용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산에서 내려가는 인간들만 산을 귀찮게 해놓고 무책임하게 떠나가고 있었다.
산은 자신이 주인이라고 하고, 인간은 자신이 산을 지배하고 정복했다고 믿고 있었다. 산과 인간은 끊임없는 투쟁관계에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산의 편에 서고 싶었다. 인간보다 산을 더 믿고 싶었다. 산은 내 마음을 아는지 내게 무척 관대한 태도를 보여주었다.
주차장에 이르니 가로등의 수은등이 달빛보다 밝게 보였다. 크기도 거의 비슷했다. 수은등은 달에 대한 모욕이었다. 인간이 달과 비슷하게 만들어 달을 욕되게 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것도 하나도 아니고 여러 개를 동시에 만들어 매달아 놓았다. 특히 달이 뜨지 않을 때에는 완전히 달의 자리를 독차지하고 있는 오만한 수은등이었다.
다시 달을 자세히 쳐다보니 수은등과는 비교할 수 없는 품위가 있었다. 말로 쉽게 표현할 수 없는 철학이 있었다. 나는 달의 철학을 생각하며 수은등을 바라보았다. 가을이 그렇게 깊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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