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운명 (53)

고등학교 졸업반 한참 꿈많고 인생의 새로운 출발점에서 돈철은 절망했다. 돈철의 운명은 갑자기 무서운 태풍을 만난 것처럼 초강속의 강풍에 뿌리가 뽑히고, 큰가지가 모두 꺾였다. 마지막 남은 작은 가지에 매달려 밤새 흔들리고 있었다. 그 가지에서 떨어져 나가는 날이면 돈철은 곧 강물에 빠져 바다로 휩쓸려갈 운명이다.

사람의 운명은 정말 한 치 앞을 내다보지 못한다. 그것은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는 각종 사건이나 현상들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재벌 회장이 수사를 받다가 자살을 한다. 그 많은 회사 직원들과 엄청난 재산을 두고 무엇 때문에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것일까? 그 회장이나 직원들, 가족들 모두 수사가 시작되기 전날까지 이런 엄청난 비극의 씨앗을 냄새라고 맡아보았을까?

돈철이 뉴스를 보니 고등학교 통학버스가 전복되는 교통사고가 발생해서 10여명의 고등학생이 부상을 입었고, 한 명은 숨졌다.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수능시험을 3주 남겨놓고 목숨을 잃었다.

사고 원인은 버스 운전자가 신호를 위반하고 달리다가 우측에서 직진하는 승용차와 충돌했다는 것이다. 고등학교 3학년 학생으로서 열심히 막바지 공부를 하고 있는 이 학생에게 이런 일이 순식간으로 일어난다는 것을 어떻게 조금이라도 상상할 수 있겠는가? 그 부모는 앞으로 또 어떻게 살아갈 수 있다는 말인가?

뿐만 아니라 순간적으로 교통신호를 지키지 못하고 교차로를 통과하려고 했다가 대형사고를 일으킨 그 운전자 역시 한 순간의 실수도 인생을 망치고, 남에게 엄청난 피해를 주고, 자신 역시 형사처벌을 받게 되고, 자신의 가족 역시 엄청난 고통을 받아야 한다.

이와 같은 사고에서 모든 원인은 오직 한 사람의 순간적인 실수에서 일어난다. 그 운전자가 그 당시 정지신호에서 정지만 했더라며, 그 버스를 들이박아 전복시킨 승용차의 운전자가 신호를 위반하고 진행하는 버스를 들이받지 않고 급정차했거나 조금만 늦게 교차로에 진입해 들어왔덜면 모든 불행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인간의 운명은 피할 수 없는 것일까? 운명에는 인간에게는 전혀 보이지 않는 손이 작동하고 있는 것일까? 모든 사고는 그야말로 몇 초 상관에 일어나고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돈철의 경우는 달랐다. 우연한 사고가 아니었다. 아주 고의적인 사건이었다. 아버지가 어머니를 버리고 젊은 여자의 육체를 탐해서 일어난 일이었다. 그 때문에 조강지처인 어머니를 팽개치고, 자신이 낳은 아들, 돈철까지 황무지에 던져버린 것이었다.

어머니에 대한 이혼과 돈철에 대한 보호의무의 포기, 유기(遺棄)은 아버지의 일차적인 목표나 의도는 아니었다. 그것은 모두 젊은 여자에 대한 동물적 욕정의 충족이라는 일차적인 행동의 동기와 그 결과에 따른 이차적인 부수적 산물이었다. 하지만 아버지의 행위의 사회적 평가는 가족의 유기가 더 중요하고 유의미했다.

돈철은 억울했다. 현재의 환경의 변화와 상황의 악화사태는 돈철 자신에게는 아무런 책임이 없었다. 돈철은 아버지가 바람을 피고, 어머니와 이혼하는데 대해 아무런 원인을 제공하지 않았다.

그런데 부모의 이혼은 곧 가정의 파괴와 경제적 재난으로 연결되었다. 아버지가 더 이상 보호자 역할을 해주지 않는다는 데에 대한 심한 결핍증세도 몰아쳤다. 혼자 남은 어머니의 연약함과 병약함에 대한 동정심은 강하게 일어났지만, 그렇다고 어머니가 존경스럽거나 대단해 보이지도 않았다.

친구들은 모두 대학교에 진학하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고 있었고, 수능시험 치러 가고, 시험장에서 부모 형제들이 합격을 기원하면서 수험생을 응원하고 따뜻한 커피와 엿, 빵을 가지고 가서 가족애가 넘치는 장면을 TV에서 보면서 돈철은 인생 최대의 절망감과 좌절감, 패배의식을 느꼈다.

수능시험을 포기하고 혼자 집에서 방황하던 돈철은 수능시험이 끝나던 시간, 자신도 마치 혼신의 힘을 다해서 수능시험을 보고 나온 수험생처럼 안도의 한숨을 쉬고 밖으로 나갔다. 수능시험을 마친 학생들이 여기 저기서 식사를 하고 영화를 보기 위해 줄을 서있었다.

돈철은 자신은 완전히 다른 인간이 된 것처럼 생각되었다. 비행기를 타고 여행을 하다가 낯선 서울에 비행기가 추락하여 혼자 살아남은 외국인, 이방인이었다.

마트에서 소주를 한 병 샀다. 마트에서 일하는 아르바이트 학생은 미성년자인지 확인도 하지 않았다. 안주는 새우깡 한 봉지였다. 동네 공원에 가서 소주를 마셨다. 갑자기 핑 돌았다. 세상은 거꾸로 돌아가고 있었다.

갑자기 아버지와 그 젊은 여자가 떠올랐다. 두 사람은 발가벗은 채로 침대 위에서 껴안고 희희락락하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살의가 느껴졌다. 도저히 가만 둘 수 없었다. 돈철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술에 취해 공원 벤치에 누웠다. 딱딱한 감각도 아무렇지 않았다. 어두운 밤하늘을 보았다. 별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그냥 시퍼렇게 무섭게 느껴질 뿐, 창공은 아주 냉정하고 비정한 세계였다. 아무 것도 없는 빈 공간인 무(無)였다.

가슴이 너무 답답했다. 돈철은 머리를 들어 벤치에 세게 내리쳤다. 그래도 머리에는 통증이 전달되지 않았다. 눈이 감겨졌다.

얼마의 시간이 지나자 이번에는 아버지의 애인이라는 여자의 나체가 떠올랐다. 아버지와 싸우고 도망쳐 나와 어떤 바닷가를 걷고 있는 못습이 떠올랐다. 돈철은 그 여자를 본 적도 없고, 사진을 본 적도 없었다.

그런데도 분명 그 여자였다. 아버지와 무수한 성교를 한 그 여자였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이번에는 그 여자에 대해 살의(殺意)가 느껴지지 않았다. 그 여자를 껴안고 성교를 하고 싶은 동물적 성욕이 강하게 일었다. 돈철은 성적 욕구를 참지 못하고 술에 취한 상태에서 자위를 했다. 그리고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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