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운명 (54)

서울의 11월은 쌀쌀했다. 낙엽도 많이 떨어졌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공원에는 노란 은행잎이 천지를 뒤덮었다. 그런 은행잎이 거의 다 떨어지고 앙상한 가지만 남았다.

돈철은 몇 시간을 술에 취해 깊은 잠이 들었다. 잠을 깨보니 새벽 4시가 되었다. 정신을 차렸다. 안주 없이 빈속에 소주를 한병이나 순식간에 들이켜서 그런지 속도 아팠다. 벤치에 앉아보니 여자 마후라가 있었다.

누군가 지나가다가 돈철이 술에 취해 벤치에서 자고 있으니 불쌍해서 벗어나 얼굴을 가려준 것 같았다. 여자 마후라에서는 진한 향수가 배어 있었다. 그리고 벤치에는 5만원짜리 지폐 한 장이 놓여 있었다. 갑자기 눈물이 났다.

‘세상에는 이런 사람도 있구나! 아버지는 나를 버렸는데, 아무 관계도 없는 사람이 이런 나에게 이런 인정도 베풀어주는구나!’

그동안 돈철은 울어본 기억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이상하게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갑자기 엉엉 소리내어 울고 싶었다. 하지만 소리는 내지 않았다. 가슴속으로 무언가 뜨거운 불덩어리가 치솟아 올라오고 있었다.

돈철은 집으로 향하던 중 24시간 영업을 하는 해장국집을 발견하고 들어갔다. 그 시간에도 몇 명의 손님이 있었다. 아버지 비슷한 남자와 젊은 여자가 같이 해장국을 먹고 있었다. 부부 같지는 않았다.

돈철은 순간적으로 아버지의 불륜이 떠올랐다. ‘저 사람들도 분명 아빠와 같이 바람을 피는 사이일 거야. 그렇지 않으면 지금 이 시간에 왜 해장국을 먹고 있겠어?’

그 생각을 하니 돈철은 순간적으로 토하고 싶었다. 구역질이 나는 것이었다. 하지만 곧 생각을 바꿔먹었다. ‘아냐. 그럴 리가 없어. 불륜관계라면 지금 시간에 모텔에 있겠지, 왜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있겠어?’

돈철은 결국 대학은 포기하고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그러면서 이제부터는 혼자 힘으로 열심히 살려고 마음먹었다. 게임도 더 이상 하지 않았다.

절실한 현실이 게임을 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어머니와 단 둘이 서로 의지하고 열심히 살았다. 그러다가 군대에 입대했다. 군대에 가서도 군생활에 충실했다.

몸이 아픈 어머니는 아버지의 도움을 전혀 받지 못한 채 죽도록 고생을 했다. 돈철은 고생하는 어머니를 생각하면 군대에서 탈영을 해서 아버지와 젊은 여자를 살인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하지만 군대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살인을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했다. 원수를 미워하지 말라는 말씀과 원수는 하나님이 대신 갚아준다는 말씀을 받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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