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운명 (28)
밤을 새워 공부를 해도, 외워도 외워도 끝이 없었다.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전혀 없었다. 윤석은 혼자 쓰는 하숙방에도 늘 학교에서 실습용으로 나누어진 사람의 뼈와 두개골 등을 가지고 와서 밤늦게까지 들여다 보고 공부를 했다. 때로는 무섭기도 했다. 죽어서 마른 뼈가 되어 땅속에 묻히지도 못하고 학생들의 손에 손을 거쳐 학습용이 된 고인들이 누군지 궁금하기도 했다.
학교에는 또 해부용 사체를 처리하는 남자 직원이 한 사람 있었는데, 그 사람을 보면 무서운 생각이 들어 멀리 돌아가기도 했다. 그러나 의사가 되려면 이런 과정을 다 거치고 담대해져야 메스를 잡고 고통스러워 울부짖는 사람의 살을 베고 수술을 할 수 있다. 중간과정을 극복해야 질병을 치료하고 건강을 회복시켜 줄 것이기 때문이었다.
남들이 흔히 하는 미팅에도 거의 나가지 못했다. 그냥 책에만 파묻혀서 지냈다. 게다가 과외지도까지 해야 했으니 주말이면 몸은 파김치가 되었다.
윤석이 대학교 2학년때 고3 여학생을 과외지도하게 되었다. 여학생인 혜경의 집에 일주일에 세 번씩 찾아가서 영어와 수학을 가르쳤다. 혜경은 부유한 가정환경에서 생활하고 있었으나, 공부에는 별로 취미가 없었다. 부모님들은 대기업의 중역이었다. 혜경의 부모님들은 매우 가정적이었다. 가족들이 외식도 자주 하고, 공연을 함께 가고, 주말에는 지방여행을 다녀오곤 했다.
혜경은 윤석에게 늘상 가족들이 무엇을 함께 했는지를 설명하는 것으로 과외공부를 시작했다. 윤석은 자신이 할 수 없는 분야의 경험을 들음으로써 간접적인 지식과 경험을 공유할 수 있었다. 혜경은 아주 예뻤다. 특히 웃을 때 드러나는 하얀 치아는 매력적이었다.
그리고 어린 나이에도 멋을 많이 부리는 편이었다. 윤석이 갈 때마다 다른 옷을 입고 있었다. 윤석은 자신이 가르치는 학생이었지만, 시간이 가면서 조금씩 이성으로서의 감정이 느껴졌다. 그러나 혜경은 전혀 그런 것이 아니었다. 서울에서 생활을 해서 그런지, 아니면 많은 남학생들로부터 과외지도를 받아 보아서 그런지, 일정한 거리를 두고 과외지도만 받겠다는 표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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