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운명 (26)
은영은 저항을 포기하고 그냥 침대에 걸터앉았다. 정 사장은 은영의 손을 꼭 잡고 누워있었다. 술에 취해서 그런지 더 이상 진행은 하지 않았다. 순간 은영은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꼭 이 방에서 나가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다.
정 사장이 성관계만 하지 않는다면 그냥 이대로 같이 있어도 괜찮을 것 같았다. 정 사장이 은영을 꼭 성적 대상으로만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냥 외국에 나와 혼자 자려니 허전해서 그럴 수 있겠다. 아니면 정말 은영을 젊은 여성으로서 호감을 가지고 좋은 감정 때문에 그럴 수 있겠다.
그래서 은영은 그냥 침대에 가만히 앉아있었다. 정 사장은 얼마 지나지 않자, 코를 골면서 잠이 들었다. 아주 깊은 잠에 빠졌다. 은영은 조용히 TV를 켰다. 기모노를 예쁘게 차려입은 일본 여자가 사무라이를 사랑하는 듯한 내용의 드라마를 보면서, 은영은 자신의 사랑이 무엇인가 생각해보았다.
뚜렷한 정체성이 떠오르지 않았다. 깨진 첫사랑만 아련하게 떠오르고, 그 나머지 육체관계를 가졌던 남자들은 모두 지나가는 작은 배 같았다. 은영은 속이 쓰렸지만, 다시 술을 마시고 싶었다. 더 취하고 싶었다.
정 사장은 와인을 무슨 이유에서인지 많이 사다놓았다. 일본 사케도 있고, 삿포로 캔맥주도 있었다. 안주는 육포와 과일이 있었다. 은영은 술을 마시고 술에 취해 쇼파에 누워서 잠이 들었다. 옷도 외출복 그대로였다. 그
렇게 몇 시간이 지났는지 은영은 화장실에 가려고 눈을 떴다. 정 사장은 여전히 깊은 잠에 빠져있었다. 은영은 제 정신을 차리고 조용히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와 자신의 호텔방으로 갔다. 왠지 허전했다.
그렇다고 커다란 모욕감을 느낀 것도 아니었다. ‘남자란 다 그런 존재다’라는 사실을 한 번 더 확인한 것에 불과한 것 같기도 했다. 다만, 아침에 정 사장을 만나는 것이 두려울 것 같기도 하고, 그렇지 않을 것 같기도 했다. 아무튼 무척 혼란스러운 상태였다.
'작은 운명'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작은 운명 (28) (0) | 2020.11.29 |
---|---|
작은 운명 (27) (0) | 2020.11.29 |
작은 운명 (25) (0) | 2020.11.29 |
작은 운명 (24) (0) | 2020.11.29 |
직은 운명 (52) (0) | 2020.11.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