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운명 (36)
영식은 가정적으로 별 불만은 없었다. 그냥 괜찮은 직장에서 중견으로 자리를 잡고 있었다. 두 자녀도 별 탈없이 착실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부인도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가는 주부였다.
경희는 남편과 별로 사이가 좋지 않았다. 남편은 술을 좋아하고, 놀기를 좋아했다. 일만 하고 집에 들어와서는 아무 말도 없이 잠만 자다 나가는 스타일이었다. 주말이면 골프와 낚시를 다니느라고 얼굴 보기도 어려웠다. 경제적인 여유는 있었지만 도대체 사람 냄새가 나지 않았다.
문학을 꿈꾸었던 경희는 아름다운 소재로 대화하는 것을 원했지만, 결혼한 이후 남편은 매우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가치관으로 무장하여 돈이 생기지 않는 시와 소설 같은 것은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글을 쓰는 사람들을 글쟁이라고 비아냥거리며 세상 물정을 모르는 한심한 족속으로 치부했다.
서로의 가치관이 너무 달라 경희는 절망했다. 그 절망의 벼랑끝에서의 몸부림이 오래 가다 보니 많이 지쳤다. 친구들이 부부동반으로 음악회를 가고 시적인 편지를 주고 받는 것을 보면 너무 부러웠다. 사랑이라는 추상성과 낭만성이 삶에 있어서 얼마나 필요하지를 절감하면서도 그 의미를 남편과 나눌 수 없다는 것 때문에 숨이 막혔다.
그런데 영식은 경희 남편과는 달랐다. 여자에 대해 매우 자상하고 많은 배려를 해주었다. 그리고 경희를 만나도 자신이 모든 돈을 쓰며, 식당이나 찻집도 싸구려가 아닌 고급으로 골랐다. 분위기 있는 곳에서 만났다. 술을 마셔도 가급적 와인 같은 것을 찾았다. 실당도 돼지갈비집이 아닌 스테이크 하우스 같은 곳을 택했다.
그러면서 경치 좋은 곳으로 드라이브를 갔고, 뮤지컬이나 연주회 같은 곳을 데리고 다녔다. 그럴 때면 경희는 마치 처녀 시절도 돌아간 것 같았다. 화장도 제대로 하고, 옷도 제대로 골라 입었다. 여자에게 그런 분위기는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
남편은 이런 영식에 비하면 너무 비문화적이었다. 분명 대학까지 나온 사람인데, 지성인이라고 하기도 곤란했다. 밖에서 친구들과 돌러 다닐 때는 골프도 치고, 고급 술집에도 다닌다.
그런데 집에서 가족들과 무엇을 하려면, 꼭 돈을 아끼자고 하고, 쩨쩨하게 논다. 뮤지컬이나 연극, 영화 같은 것에도 전혀 관심이 없다. 그래서 경희는 하는 수 없이 여자 친구들과 같이 아주 드물게 문화생활을 했다. 그런 것이 불만으로 쌓여만 갔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경희와 영식은 자연스럽게 자주 만나다 보니, 가까워졌고 어느 날 자동차 안에서 영식이 경희의 손을 잡게 된 것을 계기로 마침내 육체관계까지 하게 된 것이다. 자동차라는 밀폐된 공간에서 두 사람이 드라이브를 나가 한적한 곳에서 오랜 시간 머물다 보면, 서로 절제하지 못하고 깊은 관계에까지 이르게 된다. 그래서 자동차를 둘이 타고 다니는 것이 위험한 것이다.
두 사람은 몸을 섞고 서로의 정신적 교감을 위해 노력했다. 하루에도 여러 차례 전화를 하고 문자메시지를 수십 차례 주고 받았다. 더 이상 통화를 하지 못하고 집에 들어가야 하는 마지막 순간의 아쉬움은 매일 되풀이되면서도 늘상 비슷했다.
남녀 사이의 아쉬움은 지치지도 않는 것 같았다. 그리움은 몸을 섞으면서 더해갔다. 무엇에 대한 그리움인지도 잘 몰랐다. 육체에 대한 그리움인지, 같이 있던 그 분위기에 대한 것인지, 아니면 처절한 극한상황에서의 탈출에 대한 것인지 구별할 수 없었다.
두 사람은 모텔을 전전하기도 했고, 한적한 공원에서 과감한 행위를 시도하기도 했다. 만나면 곧 시도되는 퍼포먼스는 매우 동물적인 것이었지만, 그것을 공유하는 남자와 여자는 사회적 체면을 무시하고 실존의 몸부림을 당연한 현상으로 받아들이려는 마음가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야만과 원시상황, 동물로서의 변환은 모두 자연스럽게 용납되었다.
관계를 하면서도 경희는 아직 나이가 있었기 때문에, 피임에는 철저하게 준비를 했다. 원치 않는 임신을 했다가는 큰일이기 때문이었다. 결혼 후 외도를 하면서 남편에게서는 느끼지 못했던 성적 만족도 얻었다. 그래서 오히려 몸과 마음이 편해졌다. 그러면서도 가정을 잘 지키고, 남편과 아이들과의 관계도 예전보다 훨씬 더 원만하게 꾸려나갈 수 있었다.
지금까지는 결혼하고 다른 남자와 육체관계를 가진다는 생각은 전혀 해보지 않았다. 아무리 남편과의 관계가 불만스러웠다고 해도, 이미 결혼한 몸이고, 아이들이 있었고, 주변 사람들의 이목이 있었기 때문에 외도는 어디까지나 TV의 드라마에서나 나오는 예외적인 일, 사랑의 일탈, 비정상적인 현상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자신의 그 주인공이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일이다.
'작은 운명'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작은 운명 (14) (0) | 2020.12.27 |
---|---|
작은 운명 (37) (0) | 2020.12.26 |
작은 운명 (35) (0) | 2020.12.24 |
106. 남자가 바람을 피면 죽어서 어떻게 될까? (0) | 2020.12.23 |
105. 너무나 성격이 다른 부부가 사는 법 (0) | 2020.12.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