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운명 (18)

‘Come September!' 정현은 가을이 오면 늘 가슴이 설레였다. 왜 그러는 것인지는 몰랐다. 다만, 다른 계절과 달리 가을이 되면 마음이 들떠 가만히 있는 것이 힘들 정도였다. 우선 가을이 되면, 바람이 선선해진다. 한 여름의 폭염도 지나가고, 해수욕장의 따가운 햇볕도 수그러든다.

사과가 익어가고, 대추가 붉어진다. 딱딱하던 감이 부드러워지고, 수줍음을 타듯이 홍조를 띤다. 금요일 저녁시간이었다. 퇴근을 앞두고 정현은 갑자기 센치해졌다. 윤석에게 전화를 걸었다.

“뭐 하고 있어?”
“응. 지금 막 수술을 끝내고 나왔어. 퇴근하려고 그러는구나.”
“저녁 때 같이 술이나 할까?”
“좋아. 하얏트에서 만나. 일곱시까지 갈게.”

윤석은 정현과 같은 고등학교 친구였다. 학교 다닐 때 같은 동네에서 살았기 때문에 그 누구보다고 가까운 사이였다. 윤석도 공부를 열심히 해서 의대를 갔고, 의사가 되었다.

문과와 이과로 서로 분야는 달랐지만, 대학에 들어가서도 두 사람은 자주 만나고 가깝게 지냈다. 더군다나 처음에 입학시험에 떨어져 두 사람 모두 같은 대입학원에 1년간 다녔다. 그래서 서로에 대해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윤석의 아버지는 지방에서 제재소를 운영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젊었을 때 목수일을 하고, 광산에서도 일도 하고, 공사현장에서 노동일을 하기도 했다. 너무 많은 고생을 했다. 그러다가 어떻게 돈을 모아 친척들과 동업으로 제재소를 하게 되었는데, 처음에는 잘 나갔지만, 시간이 가면서 사업이 어려워지고 동업자간에 분쟁이 생겼다.

그리고 제재소에서 사무를 보던 젊은 여자직원과 아버지가 바람을 피웠다. 어머니가 펄펄 뛰자 아버지는 여직원과의 관계를 정리하기 위해 그 여직원에게 다방을 하나 차려주었다. 이런 저런 일로 끝내 제재소는 문을 닫게 되었고, 아버지는 50살이 되는 때에 실업자가 되었다.

윤석은 고등학교 1학년까지는 남부럽지 않은 환경에서 살았다. 그런데 갑자기 가세가 기울어지고 아버지가 돈을 못벌게 되고, 빚을 지게 되자 고생을 하기 시작했다. 윤석의 다른 형제들은 학교도 중단하기도 했다. 그런 상황에서도 윤석은 열심히 공부를 해서 결국 의대에 들어가게 된 것이었다.

윤석은 중고등학교 다닐 때 수학을 좋아했다. 다른 과목보다 수학을 제일 좋아하고, 제일 잘했다. 그래서 처음에는 공대에 가서 과학자가 되는 것이 꿈이었다. 그런데 고등학교 3학년이 되어서 갑자기 아버지가 윤석에게 의사가 되라고 강력하게 권유하셨다.

윤석의 작은 아버지가 술을 좋아해서 간이 나빠졌는데 그 때문에 병원에 다니면서 보니까 집안에 의사는 한 사람 정도는 있어야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결국 윤석의 삼촌은 간경화로 인해 45세에 돌아가셨지만, 삼촌 때문에 영향을 받은 아버지가 윤석의 진로를 바꿔놓은 것이었다.

아버지는 윤석이 공대를 가려는 것을 결사 반대했다. 의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야 본인뿐 아니라 가족들의 건강을 책임질 수 있다고 했다. 윤석은 끝내 아버지를 꺾지 못했다.

처음에 윤석은 대학입시에서 안타깝게 떨어졌다. 고등학교 성적으로는 당연히 의대에 합격할 수 있었는데, 입시 보기 보름 전에 윤석은 감기가 들었다. 열심히 마지막 총정리를 하고 있을 때였는데, 겨울에 공부를 하다가 창문을 열어놓고 몇 시간 낮잠을 잔 것이 화근이 되어 감기가 들었다.

즉시 병원에 가고 약을 먹고 제대로 치료를 했으면 괜찮을 것인데, 병원에도 가지 않고 약도 제대로 먹지 않고 버티다가 감기가 도졌다. 가뜩이나 대학입시를 앞두고 긴장을 하고 있던 터라 감기는 쉽게 낫지 않고 더욱 심해졌다. 막상 서울에 올라와서 시험을 볼 때는 귀도 멍하고 머리도 아플 정도였다. 간신히 시험을 끝까지 보았지만 결과는 낙방이었다.

시험에 떨어진 기분은 그야말로 참담했다. 더군다나 집안이 어려워서 재수를 한다는 것이 힘이 든 상황이었다. 윤석은 부모님께 미안했다. 하지만 부모님께서는 걱정말라고 하면서 1년간 서울에 가서 학원을 다니라고 했다.

그래서 윤석은 서울로 혼자 올라왔다. 대입학원에 등록을 하고 1년을 다녔다. 지방에서 올라와 서울에서 하숙을 하면서 학원을 다녔다. 학원에 가보니 대부분이 서울 아이들이었다. 학원의 분위기는 지방의 고등학교와는 전혀 달랐다.

모두들 열심히 공부를 하고 있었고, 학원의 선생님들도 실력이 매우 좋은 것처럼 보였다. 교재도 매우 수준이 놓았다. 윤석도 아무 생각 없이 그냥 학원에서 시키는 대로 열심히 공부해서 그 다음 해에 목표로 한 서울에 있는 의과대학에 합격을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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