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에서 L 교수가 11시에 사무실로 왔다. K 선생과 함께 왔는데, 11시까지 서울로 오려면 새벽부터 일어나 고생을 했을 생각을 하니 미안했다. 1시간 정도 상의를 하고 다시 대전으로 내려갔다.
오후 1시에 여의도 백화점 6층에 있는 여의도 웨딩홀에서 P 회장의 장남 결혼식이 있었다. 차를 운전하고 여의도로 갔다. 여의도 백화점을 잘 몰라, 청첩장에 있는 약도를 보면서 찾았으나 쉽지 않았다. 지나가는 택시 기사분에게 물었다. 친절하게 안내를 해 준 택시 기사는 빈 택시를 운전하고 비상라이트를 견채 내가 가려고 한 여의도 백화점 입구까지 안내를 해 주었다. 너무 친절하고 고마운 분이었다.
때로 세상을 살다 보면 아주 괜찮은 사람들을 만나기도 한다. 예식장에는 하객들이 많았다. 방송국에서 근무하는 J 부장도 왔다. 함께 연회장에서 식사를 했다. 많은 사람들이 함께 앉아야 해서 그런지 식당의 테이블과 의자가 협소했다. 다닥다닥 붙어서 7명이 식사를 한다. 갈비탕 맛이 좋았다. 결혼식장에 가면 떡도 있고, 과일도 있고, 술과 음료수가 나온다.
10월이고 가을이며 계절이 좋아서 그런지 결혼식이 많다. 아는 사람들의 결혼식에 참석해야 할 기회가 많다. 엘리베이터에서 어떤 사람이 말한다. 주말이면 몇 군데 씩 결혼식에 다녀야 해서 9월과 10월에는 주말에 골프도 치지 못한다고 한다. 관혼상제의 참석도 좀더 사회문화가 바뀌었으면 좋겠다. 직접 당사자가 결혼하거나 돌아가셨을 때만 참석하는 분위기도 바뀌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여의도에서 나와 남산으로 갔다. 남산도서관 옆에 있는 분수대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남산공원에서 산보를 했다. 가을햇살이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안중근 의사 기념관에 들어갔다. 사단법인 안중근의사 숭모회에서 관리하는 것 같았다. 입장료는 천원이다. 안중근 의사 기념관은 1970년 10월 26일 개관했다. 실내 전시실에는 안의사 일대기, 하얼빈 의거, 재판과정등을 담은 영상물과 옥중생활 모형, 활약상을 담은 수퍼그래픽, 유묵 등이 전시되어 있었다.
안중근 의사(1879~1910)는 1879년 9월 2일 황해도 해주에서 출생했다. 1909년 3월 블라디보스톡 연추에서 11명의 동지와 함께 단지동맹으로 동의단지회를 조직하였고,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역두에서 이토오 히로부미를 사살하고 대한제국 만세를 삼창한 후 러시아 헌병에 의해 체포되었다. 1910년 2월 14일 여순 관동도독부 지방법원 공판에서 사형이 선고되었다. 1910년 3월 26일 여순감옥에서 교수형으로 순국하였다.
몇년전 중국 대련에 갔다가 여순에 들러 여순감옥을 보고 왔던 기억이 새삼스럽게 떠올랐다.
기념관에서 밖으로 나오니, 몇 사람들이 바둑을 재미있게 두고 있었다. 공기 좋은 그늘에 앉아 신선놀음을 하고 있었다.
기념관 뒷편에 느티나무가 아주 멋있었다. 자세히 보니, 수령은 225년, 수고 19 미터, 나무 둘레 214센티미터로 씌어져 있었다. 나무의 소재지는 서울특별시 중구 남대문로 5가 467번지로 되어 있었다. 서울시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었다. 안중근 의사 기념관 주변에는 아름다운 느티나무가 많이 눈에 띄었다.
그러니까 벌써 34년 전의 일이다. 내가 대전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올라왔던 때가 1971년 8월이다. 그 때 형님과 함께 둘이서 삼선교 부근에서 하숙생활을 하면서 일요일에 남산에 올라왔던 기억이 있다.
그때는 나무들이 그렇게 크지 않았다. 서울시내가 다 보였는데, 지금은 나무에 가져 서울시내가 잘 보이지 않았다. 세월의 흐름을 다시 느껴 보았다.
돌아올 때 하이야트 호텔 쪽으로 오다 보니 남산 순환도로변에 은행나무들이 많이 서 있었다. 조금씩 색깔이 변해가고 있었다. 일부 나무는 많이 노랗게 색이 들었다.
가을은 그렇게 깊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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