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나기
가을사랑
삶이 권태로울 때 극복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무엇일까? 우선은 환경을 바꾸어보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세상을 바라보는 자세를 달리 해보는 것이다.
사람은 기계가 아니므로 때로 지친다. 똑 같이 되풀이 되는 삶에 회의가 느껴지기도 한다. 이럴 때는 몸을 움직여야 한다. 가만히 있는 그 자리에서 바라보는 삶은 결코 어떠한 변화도 수용할 수 없다.
꼭 그런 이유에서만은 아니었다. 비가 그친 것 같고, 구름이 조금 걷히는 것 같아 간단히 배낭을 챙겨 청계산으로 갔다. 오후 2시반경 입구에 도착해 매봉쪽으로 향했다. 생각보다 산길은 질지 않았다. 비에 젖어 있었지만 산행을 하는데 커다란 불편은 없었다.
비가 그쳐 습기가 촉촉한 숲속길은 걷기가 좋았다. 벌써 5월말이 되어서 그런지 해가 나지 않았어도, 등산을 하니 땀이 계속 났다.
비에 젖은 나뭇잎들은 묘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가물었을 때 초라해 보이던 나무들은 생기가 넘쳐 흐르고 있었다. 잎에도 물기를 축축히 올려놓고 있었다. 산속은 온통 물기 천지였다. 군데 군데 안개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안개는 특히 그 부분의 지열이 다른 곳보다 높을 때 피어오르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그렇다면 안개가 피는 곳은 보다 따뜻한 정이 있는 것이라 생각되었다. 사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차가운 사람보다 따뜻한 사람에게서 정은 솟아난다. 안개처럼 정이 아련하게 피어오르는 것이다. 안개는 웬지 모르게 푸근한 느낌을 주었다. 우리의 정도 우리를 푸근하게 해줄 것이라고 믿었다.
바닷가 모래알보다 더 많은 나뭇잎들이 바람을 맞고 있었다. 바람의 철학을 생각해 보았다. 바람은 보이지 않는 존재다. 단지 느낄 수 있을 뿐이다. 바람은 온 몸으로 느끼게 된다. 눈을 감고 있어도 불어오는 방향을 알 수 있다. 바람의 촉감은 그야말로 천차만별이다. 그때 그때 바람이 주는 촉감은 정말 너무 다르다. 사람처럼 예민한 감각을 가진 존재가 아니면 바람의 민감한 차이를 느끼기 어렵다.
바람은 잠시도 쉬지 않고 어디에서 왔다가 어디론가 가고 있었다. 나무와 나는 바람을 잡을 수도 없었다. 바람에게 기대할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바람은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고 있었다. 그래도 나와 나무는 바람의 존재를 인식할 수 있다. 바람에 특별한 이름이 있는 것도 아니다. 바람은 바람으로 끝난다.
그러나 바람은 신선한 공기를 가져다 주고, 상큼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산마루에 올라가니 갑자기 바람이 차가웠다. 바람의 변화가 궁금했다. 바람은 수시로 변한다. 그게 바람의 속성이었다.
살아 있는 존재는 항상 바람을 맞으며 살아간다. 바람 때문에 많은 변화를 겪게도 된다. 태풍 때문에 농사가 망하기도 한다. 바다의 폭풍 때문에 배가 뒤집히기도 한다. 강한 회오리 바람 때문에 차가 파손되기도 한다. 바람은 두렵기도 하고, 희망을 주는 존재이기도 하다.
바람은 사랑과 같다는 결론을 내렸다. 보이지 않는 사랑은 바람처럼 어디에서 발원되는지,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한다. 그래도 사람들은 사랑에 집착하게 된다. 바람처럼 사랑은 아무런 흔적을 남기지 않지만 우리의 몸과 영혼을 사로 잡는 이상한 힘이 있다.
매봉까지 올라갔다. 아이스크림을 파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내려오면서 철쭉을 자세히 보니 나뭇잎이 모두 5개로 합쳐서 정확한 도형을 이루고 있었다. 그동안 철쭉을 보면 항상 예쁜 꽃만 눈에 넣었는데, 이제야 그 잎들의 모습을 유심히 들여다 보게 되었다.
매봉에서 내려오는데 비가 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소나기처럼 내렸다. 애당초 우산도 없이 올라갔기 때문에 모자를 쓴 상태에서 비를 맞을 각오를 했다. 숲속에서 내리는 비를 맞는 기분도 특이했다. 우선 시원한 기분이 든다. 나뭇잎들이 일차로 막아주니까 비의 강도도 줄어들었다. 숲속에 떨어지는 빗소리는 보통 듣는 소리와는 또 달랐다. 아주 운치가 있었다. 비를 맞는게 오히려 잘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주 천천히 비를 음미하면서, 비가 내리는 청계산 숲을 감상하면서 내려왔다. 1시간 가까이 빗길을 내려오니 기분이 상쾌해졌다. 굴다리에는 채소를 파는 아주머니들이 여전히 장사를 하고 있었다. 오이와 상추 등을 만원어치 샀다. 아주 허리가 구부러진 할머니에게서 이런 저런 말을 하면서 채소를 샀다.
그 할머니는 돈 만원을 받자 만원을 벌었다며 얼씨구 절씨구 흥겨운 노래를 작은 소리로 한다. 옆에 있는 다른 아주머니들이 재미있다는 듯이 웃는다. 물건을 파는 할머니 바구니에는 천원짜리가 10개 정도 놓여있었다. 비가 와서 오늘은 물건을 많이 못팔은 모양이다.
버스를 탔다. 버스에 사람들이 가득 탔다. 창밖으로 내리는 비를 바라보았다. 서울의 도시는 비로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그런 빗속에서도 수많은 간판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그리고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힘든 일인지를 말해 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