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와 자녀와 평화로운 공존

 

자녀를 돌보기가 점점 어려운 세상이 되고 있다.

아이들은 물질만능의 사회에서 무한경쟁의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

부모들의 교육수준, 생활수준이 높아져서 아이가 경쟁력을 갖기 힘이 든다.

 

이런 상황에서 아이들을 부모 클 때 옛날 생각하고 주먹구구식으로 키워서는 큰 일 난다.

아이들은 처음부터 군대 입대한 것처럼 낯선 환경에서 외톨이가 되어 매우 힘든 훈련, 교육을 받는 신병(新兵)처럼 생각하고 대해야 한다.

 

신체적인 건강관리가 가장 중요하다. 사병이 훈련소에 들어가면 열악한 환경에서 건강을 유지하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정신을 강하게 만들어주는 것이 중요하다. 강한 정신력, 강한 의지가 없으면 약육강식의 논리가 작용하는 현대 사회에서 바깥 생활을 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교육을 학교나 학원에만 100% 맡기고 있으면 큰일난다. 학교나 학원 선생님들은 자기 자식이 아닐 뿐 아니라 수많은 학생 중의 하나에 불과하기 때문에 모든 학생에 대해 최선을 다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든 교육을 부모가 직접적으로 100% 챙기고, 학교나 학원에서는 부모의 교육 및 지도를 보완하는 것으로 생각해야 한다.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공부만 잘하도록 지도하면 안 된다. 삶의 기본적인 자세, 인생관과 가치관, 윤리의식을 동시에 가르쳐야 한다.

 

부모는 아이와 같이 붙어서 아이들이 공부할 때 옆에서 TV를 보지 말고 조용히 책을 읽고 있어야 한다. 부모가 매일 아이들 데리고 외식이나 하고, 집에서 부부간에 싸움이나 하고 냉전상태를 만들고 있으면 아이들이 정서적으로 불안해지고, 공부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게 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부부싸움이나 이혼은 자녀에 대한 죄를 짓는 것이 될 수 있다 .

 

부모 자식간에 경계를 설정하고 넘지 말아야 한다. 아이가 집에 돌아올 때까지 아이와 똑 같이, 아니 그 이상으로 사고를 당할까 걱정하고, 아이가 공부하는 것에 대해 마치 부모가 시험보는 사람처럼 행동하면 안 된다. 부모는 부모 할 일만 충실하게 하고, 모든 것은 아이에게 맡겨야 한다.

 

아이를 지도 감독한다는 의식을 버려야 한다. 힘든 마라톤경기를 같이 뛰는 공동참가자 선수처럼 서로를 격려해가면서 필요한 조언을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마라톤 뛰는 선수가 언덕길을 힘들게 오르고 있는데, ‘더 힘내라! 더 빨리 뛰어라!’라고 큰소리 치는 사람은 부모가 아니라 훼방꾼임이 틀림없다.

 

아이에게 똑 같은 말을 두 번 하지 마라. 설사 실수를 하고 잘못을 해도 결코 잔소리하지 마라. 잔소리는 머릿속으로 부모 자신에게 매일 되풀이해서 100번씩 하라.

 

아이가 부모를 실망시켜도 무조건 이해하라. 아이들은 신체가 약하고 부족하고 경험이 없고, 의지가 약하기 때문이다. 부모가 운동 열심히 안하고 매일 술이나 먹어서 자녀를 선천적으로 약하게 낳아놓고 레슬링선수하라는 것과 마찬가지다. 부모 자신도 태어나서 지금까지 자신의 부모 속을 얼마나 썩었는지 반성하라.

 

다른 아이들과 절대로 비교하지 마라. 공부만 잘 한다고 성공하는 것도 아니고, 또 성공했다고 해서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니다. 사람은 생긴대로 사는 것이 원칙이다.

 

지금까지 열거한 열 가지 사항을 가슴 속 깊이 새겨두는 것이 좋다. 부모와 자식의 평화로운 공존을 위해서다.

<사랑은 주는 걸까? 받는 걸까?>

 

사랑은 주는 걸까? 받는 걸까?

지극히 단순한 질문 같지만, 막상 그 대답은 쉽지 않다.

사랑은 누가 주는 것도, 누가 받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사랑을 주는 것을 확인할 수 없듯이 받는 것을 알 수도 없다.

사랑이란 자신의 마음을 다른 그릇에 담는 일이다.

혼자 있으면 외롭고 흔들리는 마음을 어딘가에 붙잡아 매어두는 것이다.

사랑에는 상대방을 향하는 방향성(方向性)이 있다.

어느 한 곳을 향해 흐르는 감정이다.

방향이 정해지지 않은 상태에서 움직이는 감정은 사랑이 아니다.

그야말로 방황에 지나지 않는다.

 

이처럼 사랑은 상대방의 가슴 속에 자신의 마음을 묻어두는 것이다.

때문에 사랑은 매우 추상적이다.형이상학적인 일이다.

sex와 다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사랑은 한 곳에 머문다.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 속에서 싹을 키우고 뿌리를 내린다.

격한 파도에도 흔들리지 않고 세찬 폭풍에도 견디어 낸다.

깊은 바닷속에 닻을 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사랑이 불안한 이유를 아는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눈으로 확인할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기 때문이다.

사랑은 단지 마음으로만 확인된다.

그래서 겨울 내내 뜬 눈으로 지새우면서

사랑을 확인하고 또 확인하고 싶어하는 것이다.


영원한 사랑이란 무엇인가?

사랑하는 사람 속에서 두 마음이 뒤엉켜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서로가 구별할 수 없고

떼어낼 수도 없는

한덩이 눈사람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지금 그대가 찾고 있는 사랑은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상대방의 가슴 속에 있지 않다.

그대의 가슴 속을 들여다보라.

바로 그곳에 뜨겁게 숨쉬고 있는 사랑이 들어 있다.

 


페이스북의 사랑이야기

 

간혹 어떤 사람들이 내 페이스북에 들어와 의견을 적어놓는다. 왜 허구헌날 사랑타령이냐고 지적한다. 사랑을 하려면 조용히 하면 되지 자꾸 사랑 어쩌구 저쩌구 하고 있느냐고 개탄을 한다. 나이 들어 사랑 이야기만 하고 있는 모습을 보니 한심스럽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한 모양이다.

 

이런 지적에 대해 내가 사랑타령을 하는 이유에 관한 변명을 하고자 한다. 사실 변명을 할 이유도 없는 것이지만, 고대 소크라테스도 자신의 입장을 변명한 유명한 말을 남겼다. 때로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오해하지 않도록 자신의 생각과 행동에 대한 충분한 설명을 할 필요가 있다.

 

첫째, 나는 사랑타령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사랑이란 가장 중요한 본질을 구성하는 요소다. 육체와 정신으로 구성되어 있는 인간에게 다른 사람에 대한 애정을 가지느냐 하는 문제는 삶의 방향을 결정하는 핵심이다.

 

사랑이란 매우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이런 인간에게 반드시 필요한 사랑의 문제를 나는 화두로 삼고 대화하고 있는 것이다. 공연히 의미 없는 사랑에 대한 언어의 유희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둘째, 나는 사랑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마음 아파하고 고통을 겪고 있는 현실을 보아왔다. 그래서 나는 사랑이란 아름다운 슬픔이라고 정의하기도 했다. 사랑의 현상은 자신에게 맞는 짝을 찾아 환희를 느끼고 상호 보완하고, 함께 세상을 살아가는 다리 역할을 하기도 하지만, 사랑의 부정적 측면은 몹시 비참하고 고통스럽게 만든다. 이런 사랑의 아픈 측면을 다양한 사례를 통해 연구하고자 하는 의도도 있다.

 

셋째, 사랑에 대한 담론을 통해 나는 감히 사랑학이라는 학문적 토대를 마련하고자 한다. 사랑의 본질과 사랑의 탄생, 성장과 소멸 과정을 통해 사랑을 제대로 이해하고 사랑하는 방법과 기술을 연구하는 노력을 하고 있다. 사랑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사랑을 하다가 배신 당하고 삶의 의욕을 상실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는 방법을 강구하는 길이기도 하다.

 

이상에서 설명하고 있는 것처럼 내 페이스북에는 약간이라도 인간의 정신적 측면과 정신적 사랑에 대한 중요성에 관심을 가지고 사랑이라는 아름답지만 슬픈 현상에 대한 다양한 의견을 통해 사랑을 담론화하는 역할을 하고자 한다.

 

 

비록 아는 것도 없고, 심리학자도 아니고 철학자도 아닌 그렇다고 사랑을 많이 경험한 입장도 아닌 내가 아마추어 입장에서 자유롭게 사랑이라는 화두를 놓고 글을 쓰는 것을 조금이라도 이해하고 맹목적인 비난을 하지 않아 준다면 더 이상 고마울 바가 없겠다.

 

이제 가을이 깊어가고 있다. 그동안 진한 노란색으로 우리의 눈시울을 뜨겁게했던 은행잎, 붉게 타오르는 열정으로 우리를 들뜨게했던 빨간 단풍잎, 가슴을 파고 들어와 옛사랑 때문에 불면의 밤을 새우게 만들었던 가을바람 !

 

가을 때문에 우리는 다시 사랑의 정원으로 뛰쳐나가게 된다. 그곳에서 월광소나타 피아노곡을 듣는다. 우리는 가을에 물들고, 사랑에 물들고 있다. 밖에는 비가 그치고 해가 지면서 축축한 기운에 대지는 다시 사랑을 찾고 있다. 우리 사랑을 저 아름다운 대지에 뿌리자. 너와 내가 한 마음이 되어 아름다운 사랑을 찾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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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할 수 있다는 건>

 

사랑을 한다는 건 커다란 축복이다.

사랑할 수 있음에 감사하라.

사랑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동물은 본능적 욕구 이외에는 사랑하지 못한다.

그게 사람과 다른 점이다.

 

사람중에도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환경에 의해 왜곡된 사람은 사람을 사랑하지 못한다.

사람을 싫어하고, 사람을 불신하고, 사람을 무서워하면 사랑할 수 없다.

 

사랑할 수 있다는 건 마음이 열려 있다는 뜻이다.

세파에 덜 시달렸다는 뜻이다.

사람들에게 덜 당했다는 의미다.

그건 행복이다.

그러므로 환경에 감사해야 한다.

 

자기 자신밖에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냥 혼자 일하고, 돈을 벌고, 혼자 잘 먹고, 잘 놀고, 잘 입고, 잘 자면 그만이다.

 

다른 사람에 대한 관심이나 배려 없이, 사랑 없이 혼자 이기적으로 생활한다.

 

심지어 자식이나 가족에 대한 애정도 별로 없이 혼자만 열심히 살다가 죽는다.

그것이 허망하다고 생각도 하지 않는다.

 

한 사람을 사랑하라.

그 한 사람에게 온 열정을 쏟아라.

그런 사랑으로 개인은 순화된다. 아름다워진다.

 

그래야 주위 세상도 온통 아름다워질 수 있다. 태양이 비취면 밝아서 좋고, 달이 뜨면 은은해서 좋다. 별이 보이면 시가 떠오르고, 강물이 흐르면 음악이 흐른다. 비가 오면 푸근한 무드에 젖는다. 눈이 오면 어린 아이가 된다. 그게 모두 사랑의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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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역사>

 

* 이 책은 예전에 내가 줄을 쳐가면서 정독을 했던 책이다. 1995년에 한국에서 번역서가 처음 나왔을 때 읽었다. 지금 다시 꺼내 읽어보려고 한다. 사랑이라는 현상을 매우 깊이있게 분석한 책이다. 페친 여러분들께도 일독을 권한다.

 

* 책의 주요 내용

 

‘사랑의 역사’라는 책은 프랑스의 여성 철학자 겸 대학교수, 정신분석의사인 줄리아 크리스테바(1941년 출생)가 1983년 출간한 책이다. 한국에서는 김영 교수가 1995년 민음사에서 번역서를 출간했다.

 

크리스테바 교수는 1970년 초반부터 권위주의적 가부장중심의 프랑스사회에서 여성의 정체성의 문제를 강력하게 제기해왔다.

 

‘사랑의 역사’는 사랑에 대한 광범위한 역사적 고찰을 통해 서양의 정신사의 전개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저자는 수많은 시대적 변화에 따른 사랑의 내용, 문제점을 체계적으로 분석하고 있다.

 

저자는 사랑에 대해 현상을 분석하고 역사를 고찰함에 있어서 기호학과 정신분석학적 기법을 최대한 동원하고 있다. 저자는 대학 교수이며 정신분석의사로서 활동하면서 현대인의 사랑의 고통, 사랑의 문제점을 예리하게 분석하고 있다.

 

사랑의 역사의 목차는 다음과 같다.

(1) 프로이트와 사랑 ─ 치료 중의 불안감

(2) 남성 성욕의 편집광적 에로스

숭고한 에로스

신성의 광기 ─ 그 여자와 그 남자

(3) 나르시스 ─ 새로운 정신착란

우리의 종교 ─ 유사체

(4) 신은 아가페다

사랑하는 자아는 존재한다

사랑하는 이성 혹은 고유의 것의 승리

(5) 지배하는 힘을 사랑하다

로미오와 줄리엣 ─ 사랑과 증오의 한 쌍

(6) 사랑의 아픔

사랑을 잃어버린 외계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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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싸움의 비극

 

철수는 몸부림치고 있었다. 자신이 부인을 살해했다는 사실이 믿겨지지 않는 듯 했다. 부부싸움을 하다가 칼로 부인을 찔러 사고가 났다. 10년 넘게 함께 살던 부인은 목숨이 끊어졌고, 남편은 구속되어 법정에 서게 되었다.

 

죽은 사람은 말이 없다. 그래서 재판도 쉽지 않다. 부인을 살해한 동기며 그 과정도 석연치 않았다. 남편이 범행과정을 설명하고 있지만, 검찰에서는 그 주장을 별로 받아들이지 않고 있었다. 죽은 사체며, 압수된 칼, 부검결과 등이 증거로 제출되었지만, 그것만 가지고는 범죄사실 자체가 완전히 증명된 것은 아니었다.

 

검사는 피고인에게 무기징역을 구형했다. 무기징역을 구형 받은 피고인은 몹시 초조하고 허탈한 모습이었다. 최후진술이 있었다. 자신은 결코 부인을 살해할 마음이 없었다는 주장이다.

 

부부가 살다가 싸움 끝에 살인사건이 발생하게 되면 얼마나 비참한 일인가? 서로 맞지 않으면 그냥 싸우지 말고 이혼했으면 좋았을 것을.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그리고 그 자식들은 어떻게 되는가? 어머니는 돌아가시고 아버지는 구치소에 가 있다. 한 순간에 가정은 산산조각이 나는 것이다.

 

 

결혼했으면 서로가 행동에 책임을 져야 한다. 책임을 지지 못할 것 같으면 아예 이혼하라. 그렇지 않으면 더 큰 불행이 닥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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