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 캠퍼스의 가을 분위기 때문에 고독을 심하게 느끼다
가을이 깊어가고 있었다. 대학의 가을은 풍성하면서도 심오했다. 벤치에 앉아 있어도 저절로 깊은 사색에 빠지게했다. 교정에서의 삶은 무거울 수밖에 없다. 도서관 장서에 꽂혀있는 책들의 무게에 비례해서 삶은 바다 속으로, 심연의 바다 밑으로 가라앉았다.
미경은 최고경영자과정수업을 마치고 그냥 집으로 들어가자니 너무 서운했다. 벤치에 앉아 빨간 단풍잎과 노란 은행잎을 보고 있었다. 벤치 아래로 떨어진 낙엽을 발로 비볐다. 바스락 소리가 난다.
그건 낙엽이 보내는 작은 속삭임이었다. ‘너는 아직 살아있는 거야. 무언가에 붙어있잖아?’ 낙엽의 음성을 들었다. 하지만 미경에게는 ‘매달려야 할’ 그 무엇이 없었다. 낙엽 때문에 순간적으로 진한 고독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그렇다고 외로워하지 마! 어차피 인생은 혼자인 거야.’ 다시 낙엽의 무리가 외쳤다. 미경은 그런 소리를 애써 외면하려했다. 더 진한 외로움, 더 가득한 울분이 안에서 치밀어 올랐다.
미경은 학교 앞 호프집으로 갔다. 시끄러웠다. 음악도 빠르고, 무어라고 중얼거리는데, 가수가 전달하려는 메시지는 아무 것도 들리지 않았다. 우리말로 우리나라 가수가 노래를 부르는데, 제대로 가사를 알아들을 수 없었다.
‘인생 아무 것도 아냐. 오늘이 중요해. 우리에게 내일은 없어. 우리가 원하는 게 뭔지 생각해봐. 그걸 하면 끝나는 거야. 왜 그렇게 심각한 거지. 이 바보야!’
힙합과 랩에서 이렇게 조롱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미경은 중얼거렸다. ‘여기가 한국인 거지? 라스베가스는 아닌 거지?’
미경은 맥주를 마셨다. 갑자기 취하고 싶었다. 맥주로 취하면 배가 나올 것이 걱정되었다. 가뜩이나 요새 살이 쪄서 노이로제에 걸릴 판이었다. 그래서 소주를 시켜 맥주와 섞었다. 안주는 노가리와 땅콩이었다.
미경은 자신이 아직 젊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인생은 상대적인 거라 어린 여대생들 가운데 혼자 앉아 있으니, 자신의 인생은 끝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 늙어 미안하고 눈치가 보였다. 얼굴은 몰라도 심장은 완전히 낡아빠져 사랑도 미움도 받아들일 수 없는 속수무책의 투명인간이었다.
미경은 이제 45살밖에 되지 않았는데, 대학교 앞에 와보니 완전히 나이 든 노인처럼 생각이 되었다. 할머니들이 손님으로 올 때는 미경도 어린 축에 속했는데, 대학교 앞에서는 명함도 내밀 수 없는 상황이었다.
젊은이들의 음성은 밝고 미소는 예쁘다. 미용실에 와서 자녀 자랑이나 하고 있는 중년의 아주머니들과는 전혀 다르다. 미경은 갑자기 서글픈 생각이 들었다. 가을이기 때문이리라.
한 시간쯤 혼자 술에 취한 상태에서 있는데, 갑자기 강 교수가 호프집으로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미경은 정신이 확 들었다. 강 교수는 미경을 보지 못한 채 호프집 가장 안쪽에 있는 칸막이로 들어갔다. 남학생 2명과 여학생 1명과 일행이었다. 그 여학생은 호리호리한 키에 무척 지적인 얼굴이었다.
미경은 그 여학생을 보자 순간적으로 심한 콤플렉스를 느꼈다. ‘아니 왜 저렇게 어린 여학생을 데리고 술집으로 들어오는 걸까? 저렇게 어리고 팔팔한 여학생을 데리고 다니니 나 같이 늙은 여자는 아무래도 매력이 없어보이겠지!’
미경은 혼자 앉아서 술을 마시고 있으니 옆 테이블에서 대학생들이 열띤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요새 미술시장이 너무 상업적으로 변했어. 큰 일이야. 실제 비싼 값으로 팔리는 작품을 보면 내용은 별 것 아니잖아. 장사하는 사람들이 비싼 값을 받을 수 있도록 분위기를 조장해서 그런 거지.”
“정말 맞아. 예술은 순수해야 해. 그렇지 않고 상업적으로 작품 가격이 매겨진다면 그것은 이미 예술성을 상실하는 거야. 그리고 타락한 거지.”
“김환기 화백의 작품, Universe 5 작품은 132억원을 호가했어. 제프 쿤스의 은색 고철덩어리 ‘토끼’는 1000억원대에 팔렸어. 폴 세잔의 카드놀이 하는 사람들, 피카소의 꿈(1932)도 모두 수천억원 대를 넘었어. 세상이 거꾸로 돌아가는 것 같아.”
“우리는 그런 혼탁한 시류에 휩쓸리지 말고 순수한 마음으로 오직 그림만 그리자. 돈은 필요 없어. 원래 화가는 어렵게 살아야 좋은 작품이 나오는 법이야.”
대학생들은 순수했다. 그런 순수성 앞에서 미경은 부끄러웠다. 미경은 술집에 혼자 앉아 술을 마시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초라하게도 생각되었지만, 강 교수가 자신을 보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지금 밖으로 나가야 하나? 아니면 나중에 인사라도 해야 하나?’ 이런 생각을 했지만, 술에 취해 옳은 판단을 못하고 있었다. 상황이 복잡해지자 술을 더 마셨다. 술을 마시면 변별력이 떨어진다. 그래서 술에 취하면 많은 사건과 사고가 벌어진다.
대표적인 것이 음주운전이다. 평소에는 다른 사람들이 음주운전으로 재판을 받고 징역까지 가는 것을 보면서, 자신은 절대로 술을 마시고 운전대를 잡지 않겠다고 머릿속으로 ‘정언명령’을 받아들인다.
하지만 술이 들어가면, ‘잠깐 운전하는데, 무슨 상관이 있을까? 지금 이 시간 내가 가는 곳까지 단속반이 없을 거야.’ 이렇게 생각한다. 자기 콘트롤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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