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죄체계론
가을사랑
형법에 대한 자신감을 갖기 위해서는 먼저 형법 전체에 대한 개괄적인 파악을 하는 것이 필요하다. 형법 전체의 체계를 머리 속에 넣어야 한다. 형법책을 펴놓고 앞부분에서 형법의 의의와 역사, 형법학의 전개과정, 형벌이론과 범죄이론에 대한 논의, 그리고 죄형법정주의를 공부하다 보면 갑자기 머리가 복잡해진다.
너무 많은 학설 대립이 동시에 그리고 초반에 집중적으로 열거되다 보니 형법은 매우 복잡한 법이고, 결코 체계적인 이해가 불가능할 것 같은 느낌을 받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초기에는 다른 것보다 우선해서 범죄체계론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여러 가지 학설을 공부하는 것도 좋지만, 일단은 다수설의 입장에 서서 공부하는 것이 필요하다. 초학자의 입장에서는 다수설과 판례의 입장과 내용만이라도 확실하게 알아두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한다. 다수설과 판례의 구체적인 내용도 잘 모르면서 여러 가지 학설을 열거하는 정도의 피상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어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형법은 범죄와 형벌에 관한 법이다. 범죄의 개념이 무엇이고, 어떤 행위가 범죄에 해당하는가 하는 문제가 선행적으로 검토되어야 한다. 범죄에 대한 형벌은 어떤 의미에서는 부차적이고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형법공부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범죄에 관한 사항들이다. 특히 형법총론에서 설명하고 있는 범죄이론이 가장 중요하다.
이처럼 범죄성립에 대한 일련의 검토과정을 범죄체계론이라고 한다. 범죄체계론은 전통적으로 구성요건해당성, 위법성, 책임의 3단계로 나누어 검토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범죄란 구성요건에 해당하고 위법하며 유책한 행위이다. 범죄는 행위를 전제로 한다. 행위를 전제로 해서, 그 행위가 과연 범죄구성요건에 해당하고, 위법성이나 책임이 조각될 특별한 사유가 없는지를 따지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범죄성립 여부를 따지기 위해서는 그 전제로 행위의 실질과 구조를 밝혀야 한다. 이것이 행위론이다. 행위론은 범죄론에 앞서 형법상 처벌대상이 되는 범죄의 성립을 따지기 전에 검토되어야 하는 기초적인 판단과정이다. 만일 인간의 행위라고 볼 수도 없다면, 그것은 더 나아가 범죄성립을 따져볼 필요도 없게 된다.
형법총론은 행위론 - 범죄론 - 형벌론의 순서로 연구된다. 행위론에는 ① 인과적 행위론, ② 목적적 행위론, ③ 사회적 행위론 등이 있다. 초심자들의 입장에서는 중요한 학설 내용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이 급선무다. 제한된 시간을 가지고 모든 학설을 다 망라하여 이해하려고 들게 되면 더 혼란스럽게 된다.
인과적 행위론은 행위란 인간의 정신작용에서 비롯된 신체적 동작이라고 한다. 정신작용은 인식과 의지로 이루어진다. 정신작용만 있으면 행위로 인정되고, 그 구체적인 내용은 책임단계에서 따지려고 한다. 목적적 행위론은 행위를 인간의 목적적 조종활동이라고 본다. 사회적 행위론은 행위를 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인간의 행태라고 한다. 형법의 보호벅익을 침해하는 사회적으로 중요한 인간의 행태를 행위라고 정의한다.
사회적 행위론은 인과적 행위론과 목적적 행위론에서 제시하고 있는 범죄체계를 종합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사회적 행위론이 주장하는 범죄론을 합일태적 범죄체계라고 한다. 합일태적이라는 용어는 매우 생소한 개념이다. 여러 개를 합쳐서 하나의 태양을 만들었다는 뜻으로 볼 수 있다. 합일태적 범죄체계에서는 인과적 행위론과 목적적 행위론의 범죄체계를 종합해서 새로운 개념으로 하나의 범죄체계를 만들었다는 의미다.
이러한 합일태적 범죄론에서는 ① 고의와 과실을 구성요건단계와 책임단계에서 각각 이중적으로 파악하게 되고, ② 위법성인식에 독자적인 지위를 인정하고 있다. 고의의 이중적 지위란 책임단계에서 뿐만 아니라, 구성요건단계에서 고의를 파악하는 것을 말한다.
책임단계에서 검토되는 고의는 책임고의라고 하고, 구성요건단계에서 검토되는 고의는 구성요건적 고의라고 한다. 종래 인과적 행위론에서는 어떠한 행위가 구성요건에 해당하고 위법성이 인정되면 그 다음 단계에서 그러한 행위를 유발한 인간의 정신작용의 내용을 검토하였다. 즉 책임단계에서 범죄실현에 이르게 한 정신작용의 내용을 책임요소로서 파악하였다. 이처럼 고의는 책임요소로 인정된다.
그러나 목적적 행위론에서는 인간행위의 본질적 속성으로 목적적 조종활동을 인정하므로 위법행위의 정형을 따지는 구성요건단계에서부터 실행행위가 구체적으로 어떠한 정신작용에 근거한 것인가를 확인하게 된다. 때문에 고의는 구성요건요소가 된다. 구성요건요소 중에서 주관적 요소가 된다. 이처럼 구성요건요소로 파악되는 고의를 구성요건적 고의라고 부른다. 책임요소가 되는 책임고의와 구별하기 위해 사용하는 용어다.
사회적 행위론의 입장에서 주장되는 합일태적 범죄체계에서는 인과적 행위론과 목적적 행위론의 범죄론계를 중첩적으로 사용한다. 그러므로 고의는 구성요건적 고의와 책임고의의 이중적 성격을 가지게 된다. 고의를 구성요건단계에서 검토하고, 또한 책임단계에서 다시 한번 검토하게 된다.
또한 위법성인식은 고의와는 분리된 책임요소로 본다. 따라서 위법성의 인식이 없더라도 고의에는 영향이 없고, 단지 책임이 조각되거나 감경될 뿐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