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산 단풍
가을사랑
낙엽이 바람에 뒹굴고 있다. 쓸쓸함이 저 멀리서 다가온다. 나는 문득 슬픔에 잠긴다. 사랑했던 만큼 아픔은 밀려오고, 외로움이 빈 공간을 채운다. 눈을 들어 하늘을 본다. 어디선가 날아 온 새 한 마리가 울음소리를 내고 있다. 새는 무엇을 갈구하면서 울고 있는 것일까? 새의 눈빛은 나의 눈빛과 닮았다. 내가 낯선 새에게 관심을 보이자 곧 바로 새는 내곁을 떠나갔다.
까마득한 추억의 사진들이 펼쳐지며 사랑했던 날들이 되살아 난다. 우리가 사랑이라는 존재를 손에 쥐고 살았던 시간들은 얼마나 될까? 사랑했으므로 행복했던 날들은 지워지지도, 잊혀지지도 않는 보석처럼 가슴 속에 박혀 있다. 그것은 우리가 만들었던 작은 행복이었다. 아무도 모르게 우리 둘만이 쌓았던 모래성이었다. 묵묵히 걸어가는 낙타들처럼 오아시스의 존재를 잊고 있었던 그 젊은 날들의 초상이 갑자기 되살아났다. 은행잎의 진한 노란색깔의 위력이었다.
누가 우리의 시간을 망각하게 할 수 있을까? 하늘을 향해 날개를 폈던 청춘의 싱싱한 목소리를 잊을 수 있을까? 낙엽은 떨어지면서 이름을 지우고 있었다. 어지러운 가을 바람은 가슴 속에 저장되고 있었다. 나는 바람 앞에서 내 이름을 잊어버렸다. 별들이 빛을 잃을 때까지 새벽을 기다릴 것이다.
북한산에 올랐다. 올라가는 길에 눈에 확 띄는 단풍나무가 한 그루 있었다. 붉은 단풍 앞에서 가슴이 뭉쿨해졌다. 어찌 저렇게 고울 수 있을까? 누구를 위해 치장한 것일까? 아무도 보지 않는 숲 속에서 나무는 고운 색깔로 꾸며놓고 있었다. 내가 다가갈 때까지 단풍은 처녀였다. 그 순결의 마음으로 내게 미소를 보내고 있었다.
나는 조용히 다가가 단풍의 손을 잡았다. 단풍의 숨결을 느끼며 단풍을 껴안았다. 우리는 한 동안 뜨거운 포옹을 했고, 영원한 사랑을 약속했다. 쌀쌀한 바람이 우리를 일깨워 주었고, 곧 가을이 떠나갈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했다.
내가 떠나간다는 사실을 단풍은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 나도 단풍을 떠나는 것은 아니었다. 서로를 위해 단순한 장소의 이동을 할 뿐이었다. 단풍과 나는 언젠가 다시 만날 것이다. 서로 떨어져 있어도 서로를 생각하고, 서로를 믿고, 서로를 위한 마음을 가질 것이다. 단풍과 나는 보이지 않는 정으로 이어져 있을 것이다. 그 단풍을 지나 걸으면서 나는 오랫동안 단풍의 모습을 가슴 속에 담고 있었다.
대남문까지 올라가면서 낙엽을 많이 밟았다. 낙엽은 밟혀야만 하는 운명이었다. 그 떨어진 낙엽들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와 부딪혀야만 살 수 있는 관계였다. 낙엽이 내게 밟히는 소리가 유난히 아름다웠다. 나와 낙엽은 묘한 하모니를 이루며 고요한 숲에서 오케스트라처럼 특이한 음을 내고 있었다.
내가 낙엽을 밟고 있는 것인지, 낙엽이 나를 밟고 있는 것인지 몰랐다. 낙엽은 내게 밀착되어 있있었고, 나 또한 낙엽과 아주 가깝게 붙어 있었다. 나는 낙엽과 함께 가을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바위에 기억되고 싶었다.
산에 오를 때에는 힘이 들지만, 조금만 오르면 시원한 바람 하나로 모든 고생을 잊어버리게 된다. 몸 속에서는 열이 나고, 옷 속에서는 땀이 나고 있지만, 그 열기를 식힐 수 있는 가을바람이 얼굴과 손을 때리고 있었다. 그 바람을 맞이하는 내 가슴은 떨리고 있었다. 서울 시내 그 어디에서도 이런 기분을 느낄 수는 없었다. 아무리 크게 잘 꾸며놓은 호텔 로비라운지에서도, 재벌들의 대저택에서도, 관청의 대규모 회의실에서도 이처럼 머리를 맑게 만드는 바람과 분위기는 느껴보는 것이 불가능하다.
지금 내가 북한산에 있는 시간은 내게 최고의 행복이었다. 행복은 영원성을 보장하지 못한다. 내일 일은 우리가 알 수 없다.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은 지금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 내가 아름다운 가을풍경 속에서 신선한 바람을 맞으며 머리 속이 맑아짐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건강한 상태에서 늦가을의 정취를 몸과 마음으로 느끼고 있는 시간은 커다란 축복이었다.
그래서 늦은 가을에는 실내에 있는 것이 너무 아깝다. 조금이라도 더 많은 시간을 내서 자연 가까이 다가가야 한다. 그래야 자연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고,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느낄 수 있다.
구기동 매표소에서 대남문까지는 2.5킬로미터다. 대남문부터 북한산성 매표소까지는 또 5.5킬로미터다. 모두 8킬로미터의 산행이다. 대남문 부근에서 옷을 갈아입었다. 땀에 젖은 옷을 벗고 새 옷을 갈아입으니 너무 상쾌했다.
내려오면서 계곡물에 손을 담갔다. 차가운 기운이 너무 기분 좋았다. 북한산성 매표소에서 구파발 전철역까지 택시를 탔다. 택시요금은 8천원이다. 구파발에서 3호선 전철을 탔다. 타기 전에 전철역 부근에 있는 길에서 감과 귤을 파는 아저씨에게서 감과 귤을 샀다.
70세 되었다는 남자분이 옆에 앉아 있기에 내가 먼저 말을 걸었다. 귤을 몇개 드렸더니 아주 좋아하셨다. 그래서 대화가 시작되었다. 지방에서 10년 전에 서울로 올라오셨다는데 일산에 있는 종중산에 가서 시제를 지내고 돌아가는 길이라고 한다. 20여분 대화를 나누었다. 나는 그분의 말씀을 듣고만 있었다. 세상에 대해 아는 것이 많은 분이었다. 좋은 공부가 되었다. 그분이 종로 3가에서 내릴 때 우리는 무척 서운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