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에서 만난 가을의 단상
가을사랑
Ⅰ. 가을, 사랑이 다시 오다
가을은 바람의 끝에서 느껴진다. 멀리서 날아오는 그 바람의 숨결이 느껴질 때 바람이 내 곁에 다가온 것을 눈치 챈다. 오랫동안 내 곁을 떠났던 사랑처럼 그 바람을 가슴 속에 껴안으며 시계를 본다. 저녁 7시, 해가 지면서 서산에서 달이 떠오르고 나는 달과 함께 사랑의 흔적을 어루만진다.
내 곁을 떠나 방황했던 사랑이 다시 호흡을 가다듬고 내 가슴에 서글펐던 시를 �고 함께 달을 보면, 서로에게는 눈물 이상의 진한 액체가 흐른다. 나는 그것을 사랑의 부활이라고 믿었다. 결코 꺼지지 않는 사랑의 불꽃은 가을바람을 타고 멀리서 내게 다가와 다시 태어났던 것이다. 부활은 불완전한 삶에서 완전한 차원으로의 승화를 의미한다.
우리 사랑도 그랬다. 어설픈 감정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그래서 슬프고 안타까웠던 모습에서 이제는 나무랄 데 없는 성숙한 모습으로 변했다. 우리는 그 사랑을 갈구했다. 다시는 눈물이 흐르지 않을 아름다운 연못에서 우리 사랑은 헤엄치고 있었다.
Ⅱ.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
한 자루의 낫을 들고 길을 떠났다. 내가 해야 할 일은 다시 또 풀을 베고 깍는 일이었다. 살아 있는 사람이 해야 할 일이었다. 오후 1시에 차를 탔다. 가을햇살이 무척 따갑다. 들판에는 벼가 누렇게 익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동부간선도로를 따라 의정부까지 가서 포천으로 향했다.
지난 번 일을 교훈삼아 이번에는 도움을 받을 한 사람을 찾았다. 우리는 삼정2리 노인회관 앞에서 만났다. 풀을 베는 기계를 가지고 왔기 때문에 일은 훨씬 수월했다. 풀을 깎다 보면 작은 돌이 튀어오르기도 했다. 그래서 위험해 보였다. 상당한 기술이 없으면 기계를 가지고 풀을 깎는 것도 어려웠다. 모든 일에는 그 분야에 전문가가 따로 있는 법이다. 그 사람에 비하면 내 실력은 형편 없는 것이었다. 2시간 반 정도 작업을 했다. 그 정도 일을 해도 나는 지쳤다. 비지땀을 흘리며 나는 베어진 나뭇가지를 옮기고 풀을 베었다. 사람은 흙과 가까운 거리에서 일을 할 때 자연을 배운다. 인생의 순리를 깨닫게 된다. 인생은 흙에 생기가 불어넣어져 목숨을 얻고 다시 흙으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1982년도에 상석을 만들어 놓았다고 씌여 있다. 벌써 36년 전의 일이다. 그때 경운기로 무거운 돌을 실어 나르던 장면이 떠올랐다. 세월은 그렇게 무상하게 빨리 흘러간 것이었다. 그 무렵 심은 잣나무가 울창하게 자라 하늘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컸다. 할아버지, 할머니를 위해 아버지가 산소를 만들었고, 그 다음 내가 다시 그 뒤를 이어 일을 하고 있다. 일을 마치고 산을 내려오니 길가에 맨드라미가 보였다. 원래 빨간 색인데 노란 맨드라미가 보였다.
시골에서 사는 사람들의 모습이 무척 평온하게 보였다. 자신의 환경을 넓히지 않으면 욕망은 더 이상 분출하지 않는다. 그 작은 영역에서 민들레를 키우는 심정으로 살아가면 행복은 배로 깊어질 수 있다. 그들은 낯선 환경에서 무한한 욕망의 노예가 되어 살아가는 도시사람들보다 나중에 진정한 행복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병원과 교도소가 먼 곳에 있는 그들은 질병과 징역을 맛보지 않고 오래 오래 살 수 있는 특권을 누릴 수 있지 않을까?
나도 그런 곳에서 태어났다. 깊은 산골에서 태어났다. 그 후 나는 많은 곳을 옮겨다니며 살아왔다. 대전, 서울, 의정부, 광주, 파주, 강경, 대구, 미국 워싱턴 D.C, 미국 시애틀, 과천, 제천 등에서 살았다. 그러고 보니 이사를 많이 다닌 것 같다. 지금 다시 내 마음을 한적한 농촌마을로 옮겨 보았다. 머물렀던 곳에서 내가 남겼던 작은 흔적들이 아련한 기억 속으로 떠오른다. 그것은 추억이었다.
Ⅲ. 작은 존재와 큰 사랑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송우리에 있는 찜질방 사우나를 들렀다. 우리은행 건물에 커다란 사우나가 있었다. 시설이 참 잘 되어있었다 그런 것을 닥터피시라고 하는지 모르겠으나, 작은 연못처럼 만들어놓고 그곳에 발을 담그고 있으면 작은 물고기들이 발에 달라붙어 발을 무는 것이었다. 간지러워 처음에는 견딜 수 없었으나 조금 익숙해지니 견딜만 했다. 재미있었다. 숯가마찜질방에 들어가 있으니 땀이 많이 났다.
그곳에서 밤 12시가 다 되어 나왔다. 찜질방에서 밖으로 나오니 가을바람이 너무 좋았다. 달도 밝은 가을밤, 나는 상큼한 바람을 맞으며 살아 있다는 존재의 축복을 생각했다. 커피를 한잔 뽑았다. 커피는 위 속으로 스며들면서 나를 자극시켰다. 내 감성은 달을 행해 용수철처럼 튀어올랐다.
무한한 우주 속에서 나는 아주 작은 존재였다. 아무도 인식할 수 없는 작은 좌표에서 나는 혼자 거대한 바다를 헤엄치는 작은 물고기 같은 존재였다. 그래도 내 가슴 속에는 무한한 우주를 품을 수 있는 거대한 감성이 자리 잡고 있었다. 사랑의 짙은 색으로 물들여진 가슴은 뜨거웠고 타오르는 숯불처럼 이글거리고 있었다. 먼 곳에서 개 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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