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University of Washington에서 연구하다
당시만 해도 공무원이 가족과 함께 해외연수를 가는 경우에는 1년 체류비용으로 2만 달러만 가지고 갈 수 있었다. 그 이상 가지고 나갈 수 없었다. 그러니까 네 식구가 2만 달러만 가지고, 집을 세 얻고, 자동차를 사고, 모든 것을 먹고 입고해야 했다.
시애틀에 도착하는 순간부터 고생을 했다. Washington D.C에서 출발한 비행기가 출발을 늦게 하는 바람에 마중을 나오기로 했던 신광수 사장님이 공항에서 기다리다가 그냥 돌아갔다. 우리는 아무도 없는 공항에 밤늦게 도착해서 부근에 있는 호텔에 가서 하룻밤을 자게 되었다. 지금 생각해도 얼마나 황당했는지 모른다.
다음 날 신광수 사장님을 만나 짐을 가지고 아파트로 가서 입주절차를 밟았다. 신사장님은 신건수 검사님의 친형님으로서 시애틀에서 사업을 하고 있는 재미교포다. 당시 시애틀로 유학 온 판사 검사들을 특별한 애정을 가지고 뒷바라지를 해주었다. 지금도 그 고마움을 잊을 수 없다.
아파트는 시애틀 북서쪽에 있는 레이크사이드 아파트였다. 그래도 Washigton D.C.에서 대학교 기숙사생활을 할 때보다는 훨씬 나았다. 마음 놓고 음식을 해먹을 수 있었다.
처음에는 2 Bed Room을 얻었으나 나중에 1 Bed Room으로 옮겼다. 한 달에 집세가 100 달러씩 차이가 났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해도 왜 그렇게 새가슴으로 살았는지 모른다. 한국 돈으로 따지면 한 달에 10만 원 정도 차이가 나는데, 그 당시에는 무척 큰돈으로 생각이 들었다.
원래 아이가 둘이면 1 Bed Room을 빌려주지 않는다. 그래서 적당히 이야기하고 아파트를 옮겼다. 이사할 때에도 다른 사람 도움 없이 우리 힘으로 옮겼다.
8월 14일에는 미국 교포 김진원씨로부터 1981년형 Citation 차를 샀다. 3천 달러를 주었다. 차는 3만5천 마일을 달린 상태였다. 은빛 색깔이었는데 괜찮은 차였다. 미국 생활은 차가 없으면 힘이 들기 때문에 우선 차부터 샀다. 한국에서 국제운전면허증을 발급받아 가지고 갔기 때문에 미국 운전면허증을 따기 전까지는 그대로 운전할 수 있었다.
미국 운전면허증을 따는 것도 쉽지 않았다. 학과시험은 단번에 합격했는데 주행시험에서 세 번이나 떨어졌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으나 미국인 시험관이 의도적으로 그랬던 것 같다. 운전을 아주 조심스럽게 하지 않는 버릇을 고쳐주기 위해서 그런 것 같았다. 아무튼 몇 번 시험을 보러 다니면서 기분은 좋지 않았다.
나는 군대에서 법무관 생활할 때 자동차운전면허를 취득했다. 군대에서 집차를 타고 다니면서 운전병으로부터 운전을 배웠다. 그리고 2종이 아닌 1종 면허를 취득했다. 1982년에 파주에서 면허를 딴 것이다. 한국에서 이미 몇년간 운전을 잘 하고 다녔는데 자꾸 떨어뜨리다니 이해가 가지 않았다.
University of Washington, Law School에서 Visiting Scholar로 1년간 국제형법을 연구하기로 했다. 한국 법무부에서 현직 검사 자격으로 미국 대학교와 협조가 되었기 때문에 대학교에서는 아주 협조적이었다.
법학대학원 건물 지하 1층에 연구실을 얻어 4명이 함께 사용했다. 듣고 싶은 강의도 듣고, 도서관에서 자료도 찾아보고, 수시로 교수들과 토론할 기회도 얻었다.
국제형법 중 국제테러리즘에 관한 국제형사사법공조에 관하여 집중적으로 연구했다. Henderson교수가 많은 배려를 해주었다. 당시 법무부에서는 나에게 미국 유학과제로 1988년 서울올림픽을 대비한 국제테러방지대책에 관한 연구를 하도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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