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미국에서의 생활

 

 

 

국제테러리즘에 관한 연구를 했다. 각종 서적을 읽고 자료를 수집하고 강의를 들었다. 한국에 돌아온 다음 체계적인 연구 논문을 발표했다.

 

나는 시애틀에 있을 때 어느 한국 고위직 공무원이 미국에서 유학생활을 할 당시 일으켰던 교통사고와 관련한 민사소송에 관여했다. 공무원의 미성년자인 자녀가 승용차를 운전하다가 오토바이를 타고 가던 미국인을 치었는데 그로 인해 피해자가 식물인간이 되었다.

 

사고 소식을 들은 한국 공무원은 현장에 도착해서, 미국 경찰에게 딸 대신 자신이 운전했다고 진술했다. 어린 딸을 대신해서 사고를 수습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나중에 이것이 문제를 크게 만들었다.

 

그 후 형사문제는 해결이 되고, 공무원과 딸은 한국으로 귀국했다. 미국 피해자는 변호사를 선임해서 한국 공무원 개인과 한국 정부를 상대로 10억 원의 손해배상청구소송을 미국 법원에 했다. 한국 정부에서는 이에 피고로서 대응해야 했다.

 

시애틀에 유학을 가게 되자 법무부에서는 나를 국가소송대리인으로 지정해서 소송을 수행하도록 했다. 현직 검사로서 미국에 유학 가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그런 법률적 자격이 있었다.

 

나는 미국 보험회사 변호사를 만나 소송전략을 상의한 후 한국 법무부 담당자에게 수시로 대응방안을 보고했다. 미국 법정에도 미국 변호사와 함께 나갔다. 모든 것이 영어로 서류작성을 해야 했고, 법원에서 송달되는 서류도 영어로 된 것을 분석해야했다.

 

법무부에서는 나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소송에서 이길 것을 기대하고 있었다. 한국 정부가 지면 보통 문제가 아니었다. 이 소송은 대한민국 정부가 이겼다. 국가의 주권면제이론을 적용해서 미국 피해자는 패소했다. 법무부에서는 아주 좋아했다. 상급자들이 전화로 많은 격려를 해주었다. 사건 당사자였던 고위 공무원으로부터도 고맙다는 전화를 받았다. 고생한 보람을 느낄 수 있었다. 한국을 위해 작은 기여를 한 것이라는 자부심도 가졌다.

 

1986년 8월 30일 캐나다로 갔다. Interstate 5번 하이웨이를 타고 밴쿠버까지 갔다. 캐나다 1번 인터스테이트 프리웨이를 타고 Hope까지 갔다. 그 다음 Kamploofs까지 달렸다.

 

부슬부슬 내리는 이슬비 속에 피어오르는 산봉우리의 안개, 도로 양쪽에 전개되는 웅장한 산야, 캐나다 특유의 나무, 평원, 우리는 환상적인 세계에 빠져 들어가고 있었다.

 

세상에 이런 곳이 있는 줄 예전에는 미처 몰랐다. 누런색의 고원에 드문드문 서있는 푸른 나무들, 서부 영화 장면에 나오는 전쟁터 같다. 호수도 커서 자동차로 20분 이상 달려도 끝이 보이지 않는다. 재스퍼에서 밴프까지 드라이브를 하고 2박 3일간의 자동차 여행을 마쳤다.

 

시애틀에서 생활할 때, 자동차보험을 들러 갔다가 재미교포 조한천씨를 만나 도움을 받았다. 미국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는데, 자동차에 대해 많이 알고 있는 교포로부터 도움을 받아 보험에 가입하고 나니 귀인을 만난 것 같았다. 그것이 인연이 되어 조한천씨가 다니는 교회에 나가게 되었다. 그 교회 사람들과 1년 동안 가깝게 지냈다.

 

시애틀에서는 학교에 가서 강의를 듣고, 도서관에서 책이나 자료를 찾아보는 것이 주된 일과였다. 아파트에서 학교까지는 멀었기 때문에 자동차를 운전하고 다녔다. 점심은 주로 집에서 샌드위치를 만들어 바나나와 같이 싸가지고 다녔다. 아이들은 초등학교와 유치원을 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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