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미국 유학 생활을 마치다
1987년 8월 유학생활 1년을 마쳤다. 미국 생활은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것이었다. 처음 미국에 도착했을 때는 어떻게 1년을 보내나 싶었는데, 떠나면서 되돌아보니 아쉬움이 많이 남았다. 언제 다시 이곳에 와 볼 수 있을까 싶었다.
당시 공무원 신분으로 외국에 나가는 건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공무출장이 아니면 해외여행은 불가능했다. 검사로 근무하면서 업무 성격상 해외로 출장 가는 기회도 거의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특혜를 받은 것이었다. 당시만 해도 해외로 유학 가는 검사 수는 1년에 5명에 불과했다.
미국에서 생활하는 동안 많은 것을 보고 느꼈다. 여러 가지를 배웠다. 세상이 얼마나 넓은 지도 깨닫게 되었다.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는 책의 제목처럼 정말 세상은 넓고 넓었다.
그동안 한국에서 고시에 붙었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잘난 척하고 살아온 나로서는 겸손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한국이라는 작은 나라에서 우물 안 개구리였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한국에서는 별로 불편함을 느끼지 못하고 있던 일들이 미국에서는 어렵게 느껴졌다. 모든 것을 직접 해야 했다. 한국에서는 아는 사람에게 부탁할 수 있는 일도 미국에서는 부탁할 사람이 없었다.
이발소 가는 것도 귀찮은 일이었다. 한국과 다른 스타일로 깎아주기 때문에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발도 잘 안하게 되고, 집에서 가위로 깎기도 했다. 집에서 이발을 하니 모양이 엉성했다.
일반적인 가위는 머리카락을 자르는 용도가 아니었기 때문에 잘 들지 않았다. 떨어지는 머리카락도 장난이 아니었다. 보자기를 깔고 해도, 머리카락은 카펫이 깔려있는 거실 사방 군데 퍼졌다. 그동안 한국에서 얼마나 편한 생활을 하고 있었는지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아파트에 전화를 설치하는 것도 그렇고, 중고자동차를 사는 일, 자동차 보험에 가입하는 일, 아이들을 유치원과 초등학교에 입학시키는 일, 쇼핑을 하는 일 모두 내가 직접 해야 했다.
자동차여행을 하는 것도 지도를 사서, 많은 연구를 한 다음 다녀야 했다. 대부분 초행길이었으므로 길을 찾는 것도 힘이 들었다. 지금처럼 네비게이션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미국 도서관에 가서 그 많은 장서를 보면서 한국으로 돌아가면 더 많은 시간 책을 보면서 공부를 해야겠다는 각오도 새롭게 했다. 미국 도서관에서 로스쿨 교수들이 써놓은 수많은 논문 깊이에 감탄하기도 했다.
시애틀에서 미국 대학원생 한 명을 알게 되어 영어 공부를 했다. 일본에서 온 친구와 함께 레슨을 받았다. 시애틀에 유학 온 몇 명의 한국인들과 자주 만났다. 김찬진 변호사님이 몇 달 동안 시애틀에 와 있는 동안 함께 식사도 했다.
미국에 있는 동안 인사 발령이 났다. 대구지방검찰청에서 2개월간 근무하다가 미국으로 유학을 갔다. 원래 인사 기준에 의하면 이런 경우 다시 대구지검으로 돌아가 2년 정도 더 근무하는 것이 원칙이다.
한 청에 발령을 받으면 보통 2년 정도 근무하는 것이다. 그런데 1년 만에 법무부로 발령이 났다. 더군다나 대구지검에서 실제 근무한 것은 2개월밖에 안 되는 상태에서 법무부로 발령이 나니 그야말로 파격적인 인사였다.
왜 이런 발령이 났는지 모른다. 추측컨대 미국 법원에서 한국 정부를 상대로 한 10억 원 손해배상청구사건에서 국가소송수행자로 열심히 일을 해서 한국 정부가 승소했는데 그 과정에서 법무부에서 내 능력을 알아주었던 것이 아닌가 싶다. 검사 인사에 대해서는 결과만 알지 그 과정을 알 수는 없다. 물어볼 곳도 없고,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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