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서울지검 동부지청에서 근무하다

 

 

 

홍콩을 거쳐 시드니로 갔다가 국내선을 타고 멜버른으로 갔다. 비행시간도 만만치 않았다. 힘든 여정이었다. 미국에서 1년간 유학생활을 한 다음, 공부한 국제형법을 활용한다는 측면에서 매우 보람을 느낄 수 있었다.

 

호주는 영미법계 국가로서 이미 많은 나라와 범죄인인도조약을 체결해서 운영하고 있었다. 특히 영연방국가로서 일찍부터 영국의 중범죄인들을 호주로 보내 수용했던 역사적 경험이 있어 범죄인인도제도에 많은 경험이 있었다.

 

호주와 조약체결작업을 추진하면서 느낀 것은 우리나라도 국내법을 빨리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호주출장에서 돌아와 곧 바로 범죄인인도법 제정작업에 착수했다. 외국의 입법례를 참고해서 법 초안을 만들어 관계기관에 의견조회를 했다.

 

나는 범죄인인도법 초안을 만들어 국무회의를 통과하고 국회에서 최종적으로 법률안이 통과될 때까지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쏟았다. 나름대로 커다란 사명감을 가지고 일했다. 그래서 1988년 8월 5일 범죄인인도법은 마침내 국회를 통과했다.

 

검찰2과에서는 주한미군범죄사건에 관한 형사정책업무도 담당하고 있었다. 주한 미8군 법무감실과 SOFA 형사재판권규정을 개정하기 위한 협상을 계속했다. 통역 없이 영어로 회의를 했다.

 

이런 저런 경험이 쌓여 국제형법전문가가 되었다. 국제형법 교과서를 저술해서 책으로 펴내기도 했다. 국제형법이라는 강좌를 만들어 사법연수원에서 강의도 했다.

 

검찰2과에서는 주로 일반 형사사건을 다룬다. 그래서 전국 검찰청에서 올라오는 중요한 사건에 대한 수사상황을 보고 받는다. 지금은 많이 달라졌지만, 당시만 해도 큰 사건, 중요한 사건에 대해서는 국회에 나가 법무부장관이 답변해야 했다. 실무적으로 사건진행상황을 법무부에서 모두 파악하고 있어야 했다.

 

1990년 3월 인사가 있어 고등검찰관으로 승진하였다. 부장검사 바로 밑에 있는 직급이었다. 서울지방검찰청 동부지청 형사2부 소속으로 발령받았다. 당시 과천 아파트에서 살고 있었다. 집에서 사무실까지 너무 멀어 출퇴근이 어려웠다. 그래서 차가 막히는 시간을 피해 일찍 집에서 나왔다. 일찍 도착하면 워커힐호텔 사우나에 들렀다.

 

우연히도 형사2부장은 법무부 검찰2과에서 과장으로 모시던 백삼기 부장님이었다. 나보다 먼저 동부지청으로 발령이 난 것인데, 내가 그 다음에 동부지청님으로 가게 된 것이었다. 이영학 지청장은 내가 초임검사 때 서울중앙지방검찰청에서 형사5부장으로 모시던 분이었다.

 

이진강 차장검사님은 고향이 포천 동향이었다. 차장님은 나중에 대한변호사협회 협회장을 지냈다. 당시 나도 수석부협회장으로 러닝메이트로 선거에 나가기로 했다가 개인적인 사정으로 그만두었다.

 

지청장과 부장검사는 과거에 내가 모셨던 상사들이라 서로에 대해 잘 알고 있었고, 호흡도 잘 맞았다. 그래서 나에게 모든 업무를 맡겼다. 형사2부에는 소속 검사가 8명 있었다. 나는 고등검찰관으로서 중간 관리자 역할을 했다.

 

대부분 내 방에서 검사들 모임을 가졌다. 대전고등학교 1년 선배인 백오현 검사님이 있었다. 고등검찰관이 되니 평검사와는 대우가 달랐다. 사무실 안에서 회의할 수 있도록 쇼파도 주어졌다. 조사실은 따로 직원들과 함께 사용하도록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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