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 서부지청에서 근무하다

 

 

 

‘가을사랑’ 시집은 김홍욱 사장이 대표로 있는 육서당에서 출간되었다. 초판은 1995년 10월 10일, 2판 인쇄는 1996년 2월 5일 하였다. 김순지 소설가가 ‘시인의 감성, 김주덕 노트의 둘째장’이라는 제목으로 시평을 써주었다. 나중에 이숙영 아나운서가 ‘가을사랑’ 시집을 낭송해서 카셋트 테이프로 만들었다. 테이프를 1,000개 제작해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2년 간의 대검찰청 환경과장 근무를 마치고, 1996년 8월 서울지방검찰청 서부지청 형사제3부장검사로 발령이 났다. 형사3부는 특별수사와 공안업무를 담당했다. 당시에는 서부지청에 부가 3개밖에 없었다.

 

초임검사 시절에 서울지방검찰청에서 함께 근무했기 때문에 잘 아는 신광옥 지청장님과 최효진 차장검사님을 모시게 되었다. 형사3부에는 4명의 검사가 있었다. 모두 열심히 일을 하는 검사들이었다. 형사 1부장은 김영철 부장검사님, 형사 2부장은 신언용 부장검사님이었다.

 

지청장님은 리더십이 강하고, 사려가 깊은 분이었다. 그분을 지청장으로 모시면서 많은 것을 배웠다. 대단한 능력을 가진 분이다. 나중에 그 분은 검찰에서 주요 보직을 두루 거쳤다. 대검찰청 중앙수사부장, 청와대 민정수석비서관, 법무부 차관까지 지냈다.

 

방이동 집에서 마포 공덕동 사무실까지 출퇴근하는 것은 힘들었다. 차를 가지고 다니자니 운전하는 시간이 너무 많이 걸렸다. 출퇴근시간에는 차가 막혔다. 그래서 주로 지하철을 이용했다. 지하철 5호선을 올림픽공원역에서 타고 다녔다.

 

모의총포단속과 불법음반단속 등을 중점적으로 했다. 모의총포단속은 김용호 검사가 했다. 형사3부장 때 본청 검사장인 최환 검사장님이 지청을 방문하여 신광옥 지청장님과 함께 연세대학교를 방문한 일이 있었다.

 

그 다음 인사 때 형사1부장검사가 되었다. 재경지청에서 또 다시 같은 지청 부장으로 근무하는 것은 안 좋은 인사였다. 그 다음에 본청 부장으로 못가면 옷을 벗는 경우가 많았다. 신광옥 지청장님도 나와 똑 같이 지청장 자리에서 다른 곳으로 옮기지 못하고 눌러앉았다.

 

서부지청 근무를 마치고 1997년 인사 때 서울지방검찰청 총무부장검사로 발령이 났다. 총무부장검사는 청 전체의 업무를 총괄하는 부서다. 각 부의 업무를 총괄해서 취합하는 일도 한다. 매우 바쁜 자리였다.

 

당시 인사권자는 김종구 법무부장관님이었다. 대전고등학교 12년 선배이며, 서울동부지청에서 고등검찰관으로 근무할 때 지청장으로 모셨다. 그후 김종구 선배님이 대전지방검찰청 검사장으로 근무할 때 나는 대전고등검찰청 검사였다.

 

총무부장은 검사장실에서 차장검사 세 사람, 사무국장과 함께 하는 회의에 참석한다. 검사장은 사법시험 8회인 안강민 검사장님, 차장검사는 이범관 1차장님, 김진환 2차장님, 정홍원 3차장님이었다. 나는 청 전체의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하고 업무의 방향을 잡는 기능을 해야 했다.

 

전체 부국장회의나 전체직원조회, 부과장회의 등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항상 긴장하고 있어야 했다. 이범관 1차장님은 나중에 여주에서 국회의원을 지냈다. 정홍원 3차장님은 후에 국무총리를 지냈다. 김진환 2차장님은 서울지검장을 지냈다. 김진환 차장님 때문에 내가 대한공증인협회 부회장으로 일을 하게 되는 인연도 있다.

 

정기국회 국정감사 때는 1달 정도 매일 야근을 하면서 총괄적인 준비작업을 했다. 총무부장을 맡고 있던 중에 테니스를 치다가 다리를 다쳐서 한동안 불편한 상태로 근무를 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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