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 서울중앙지방검찰청에서 근무하다

 

 

그후 공판부장검사로 발령이 났다. 사무실은 법원 서관 12층에 있었다. 공판업무를 연구하는 작업을 했다. 공판부에는 부부장검사와 평검사가 모두 14명이 있었다. 현재는 공판1부와 공판2부로 나누어졌으나 내가 근무할 때만 해도 하나의 공판부가 있어 검사 수로는 전국에서 제일 많은 부였다. 내 방에서 공판부검사회의를 하려면 방이 꽉찼다. 백창수 부부장검사가 같이 근무를 했다.

 

나는 공판부장으로서 공판업무에 관한 업무지침서를 만드는 작업을 했다. 각 검사들에게 하나씩 연구과제를 부여하고 광범위한 자료수집작업을 하도록 했다. 그 결과 1998년 8월 10일, ‘공판 및 형집행실무’라는 책자를 발간했다. 인쇄는 도서출판 성민기업에서 맡았다.

 

편집위원을 보면, 김주덕 부장검사, 신배식 및 백창수 부부장검사, 문규상, 고범석, 손영기, 김호정, 허태욱, 최성진, 조상철, 변창훈, 최성남, 임관혁, 백재명, 추원식, 홍연숙 검사다. 서희석 공판사무과장, 고영식 및 김길수 검찰주사, 오형묵, 송락관 검찰서기도 자료정리를 해주었다.

 

변창훈 검사는 이때 초임검사였다. 사법연수원 23기다. 군법무관을 마치고 서울지검 초임 발령을 받았다. 그런데 2017년 11월 6일 서울중앙지검에서 조사를 받고 영장실질심사를 앞두고 서초동 어느 변호사 사무실이 있는 건물 4층에서 투신했다. 그리고 병원으로 옮겨져 사망했다. 너무 안타까운 일이다. 조사 받을 때에도 서울고등검찰청 현직 검사 신분이었다.

 

사람의 운명은 하루 아침에 바뀌게 된다.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이 발생하면, 그에 따라 진로를 바꾸는 것이 불가피해진다. 그것은 숙명이었을까? 아니면 예정된 수순이었을까? 나는 지금도 그 의미를 알지 못한다.

 

1998년 7월경 그동안 사업부진으로 고생을 하던 장인 회사가 부도났다. 대표이사인 장인은 형사고소를 당했다. 약속어음을 발행해 주었는데 부도 처리되었고, 어음소지자는 사위인 내가 현직 검사로 있기 때문에 사건 처리가 제대로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진정서를 제출했다. 당시 IMF 직후라 회사 부도사건이 급증했다. 검찰에서는 어음이나 수표부도 사건에 대해 대부분 불구속처리를 하던 때였다.

 

장인이 부도가 나서 형사고소를 당하자 창피한 생각이 들었다. 사표를 낼까 고민했다. 변호사를 잘 할 수 있을지는 자신이 없었다. 나는 일주일 정도 고민을 하다가 결단을 내렸다.

 

변호사를 어떻게 할 것인지는 나중 문제고, 일단 사표를 내기로 마음먹었다. 아무런 대책 없이 그냥 사표를 내기로 한 것이다. 어떻게 보면 무모하기 짝이 없었다. 다른 사람과 상의하지도 않았다. 일단 사표를 내려고 마음먹으니 사무실에 나가도 이상했다. 내가 있을 곳이 아닌 것처럼 낯설게 느껴졌다. 하루하루 견디기가 어려웠다.

 

박순용 검사장님께 사표를 제출했다. 검사장님은 왜 사표를 내느냐고 했다. 처가가 부도난 것이 무슨 사유가 되느냐고 했다. 나는 일단 결심했다고 말씀드리고 사표를 수리해달라고 했다. 그래서 사표는 수리되었다.

 

1998년 8월, 16년 간의 검사생활을 마치고 변호사로 새 출발을 했다. 오랜 조직생활에 익숙해 있던 내가 단독사무실을 차려 운영한다는 것은 두려운 일이었다. 사실 그 당시는 아무 것도 몰랐기 때문에 별 생각 없이 개업을 했다. 지금처럼 변호사 업무가 어떤 것인지 많이 알았더라면 꽤나 망설였을 것이다.

 

개업식을 할 것인지 고민했다. 조용히 변호사 업무를 하면 되지 주위 사람들에게 알려 요란을 떠는 것이 우스꽝스럽게 생각되었다. 변호사 개업 준비를 담당하는 회사가 있었다. 그 회사에서는 개업식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개업인사장을 돌리는 것도 꼭 해야 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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