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 이종기 변호사 사건을 변론하다

 

 

 

변호사 개업을 한 1998년 가을은 내 인생에 있어서 가장 바쁜 시기였다. 사회적으로 중요한 이슈가 된 형사사건을 많이 맡아 변론을 했다. 특히 신동아그룹 최순영 회장 사건 때문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사건 관련인이 미국에 거주하고 있어, 미국과 일본, 카자흐스탄 등을 여러 차례 출장을 다녀오기도 했다.

 

공무원 신분으로 있을 때는 외국에 한 번 나가려면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특별히 출장갈 일이 있어야 해외여행이 가능했다. 그때마다 일일이 상부에 보고해야 했다. 변호사가 되니 내 마음대로 외국에 나갈 수 있었다.

 

특히 중국이나 일본은 1박 2일로 다녔다. 미국에도 다녔다. 태국에도 다녀왔다.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가서 미국 변호사와 회의도 했다. 의뢰인은 출장가는 변호사를 위해 항공권도 비즈니스 클래스로 제공했다.

 

몇 건의 커다란 형사사건 변론을 하다 보니 1998년 가을은 그냥 지나갔다. 그리고 겨울이 왔다. 그러던 중 1998년 12월에 대전에서 이종기 변호사 사건이 터졌다. 그 전에 의정부에서 어떤 변호사사건이 발생한 후 연이어 터진 이 사건의 위력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법조비리 전반으로 사건이 확대되었다.

 

모든 법조인이 여론으로부터 질타를 받았다. 이 사건이 진행되면서 변호사는 사회에서 아주 나쁜 이미지로 부각되었다. 마치 판검사와 유착하여 사건을 해결하는 브로커로 비추어졌다. 나는 변호사를 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부끄러웠다. 변호사 뱃지를 달고 다니기도 민망스러웠다.

 

대전지검 부장검사 출신 이종기 변호사의 사무장이 수임내역서 등 비밀장부를 폭로함으로써 수사가 시작되었다. 현직 판ㆍ검사를 포함해 검찰과 법원 직원, 경찰관 등 300여명이 변호사에게 사건을 알선하고 소개비를 받았으며 검사 25명도 금품을 받은 것으로 밝혀졌다. 검사장급 2명을 포함, 검사 6명이 사표를 내고 7명이 징계를 받았다. 판사 2명도 사표를 냈다.

 

우연히 서울구치소에서 이종기 변호사님을 만나 접견을 하고, 그에 대한 변론을 하기로 했다. 많은 변호사들이 변호인으로 선임계를 제출했지만, 제대로 변론을 하기가 어려웠던 모양이다. 나는 기꺼이 이종기 변호사님에 대한 변론을 자청하고 선임계를 낸 다음 대전에 가서 공판기일마다 변론을 했다.

 

당시 정해원 변호사님과 둘이서 주로 변론을 했다. 6개월에 걸친 변론 끝에 이종기 변호사님에 대해 대전지방법원에서 무죄판결이 선고되었다. 나는 1심판결선고시까지만 변론을 했다. 그런데 이 사건은 그후 항소심에서 유죄판결로 변경되었고, 대법원에서도 유죄로 확정되었다. 이종기 변호사님은 1952년생으로 사법연수원 6기로 수료했다. 2016년 4월 9일 세상을 떠났다.

 

1999년 3월 5일 김재춘 회장님 서울대공원부지 관련 사건을 맡았다. 형사와 민사사건을 맡아 2013년까지 소송수행을 했다. 이 과정에서 2003년 1월 16일 서울고등검찰청에서 피고소인에 대한 위증사건에 관하여 공소제기명령이 내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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