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운명 (234)

 

시간이 가면서 현옥이 조장보다 더 빠져들어갔다. 현옥은 처음이고, 조장은 이미 수많은 경험을 지닌 사랑의 베테랑이었기 때문이었다.

 

여자를 다루는 데 아주 능숙했다. 정치학과 학생인 데다가 전체 총학생회장이며, 아버지의 지도를 받아서 그런지, 여자를 만나서 꼬시고, 데이트하면서 마음을 사로잡고, 성관계를 하고, 그 후 사후관리를 어떻게 하는지 모든 것을 사전에 완벽한 기획을 하고 계획서를 만들어서 실행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 습관은 아버지가 평생을 살아오면서 하던 것이었다. 특히 아버지는 시장이 될 때까지 공직에 있었기 때문에 모든 일을 주먹구구식으로 하지 않고, 체계적으로 사전에 계획을 세우고, 타당성 조사를 하고, 실행과정에서도 그때그때 시행착오를 거쳐서 궤도수정하는 업무처리방식이 몸에 배었던 것이었다.

 

그래서 시장으로서도 성공적으로 시정을 마무리했고, 그 후 사업에서도 성공했다. 아버지는 이런 기업적 마인드, 행정마인드, 합리적 사고를 가정생활에서도 그대로 적용했다.

 

결혼 초기부터 아버지는 가정생활의 계획을 수립했다. 물론 어머니와 상의하는 일은 결코 없었다. 아버지는 A4 용지에 매일 일일생활계획표를 써서 어머니가 볼 수 있도록 벽에 붙여놓았다.

 

처음에는 지저분한 싸구려 누런 종이를 뿥여놓았다가, 어머니가 미관상 좋지 않다는 건의를 하자, 아버지는 눈물을 머금고 다소 비싸더라도 하얀 고급 A4용지로 교체하는 통큰 결단을 내렸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이런 개선조치에 아버지 못지 않게 작은 눈물을 몇방울 흘렸다.

 

어머니는 작은 스티커를 냉장고에 많이 붙여놓았다. 주로 중국집 전화번호, 세탁소, 가전제품 수리센터 등의 번호였다. 아니면 시장 볼 아이템을 미리 적어서 붙여놓았다. ‘파, 냉면, 참기름, 간장, 양파...’ 이런 것이 어머니에게는 중요했다.

 

하지만 아버지가 써놓은 계획표는 매우 중요한 사항들이었다. ‘① 오전 7시 기상, ② 오전 8시 아침 식사, ③ 오전 11시까지 휴식, ④ 오후 3시 시장가서 물건 구입, ⑤ 오후 7시 저녁 식사, ⑥ 오후 9시부터 2시간 동안 TV 시청, ⑦ 오후 11시 취침’ 이렇게 하루 일정을 타이트하게 잡아놓았다.

 

아버지는 어머니가 친정집에 갈 일이 있다면서 같이 가자고 하면 일정표에 사전에 ‘처갓집 방문’이라고 쓰고 구체적인 시간, 즉 몇 시에 출발해서 처잣집에 몇 시간 체류하다가 돌아온다는 것을 명시했다.

 

이런 습관은 아버지가 군대에서 ROTC 출신으로서 장교로 근무했던 경험 때문에, 시간이 소중하다는 것, 시간을 낭비하면 안 되고, 특히 시간관념이 정확하지 않으면 안 되다는 진리를 몸소 터득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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