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운명 (88)

 

공칠은 피곤한 상태에서 혼자 저녁을 먹었다. 최근에 시장 선거와 관련하여 민첩 사장과의 갈등 때문에 너무 많은 스트레스를 받았다. 갑자기 술에 취하고 싶었다.

 

TV에서는 대학 축제가 한창이라는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 봄나들이 하는 젊은 연인들이 부러웠다. 혼자 소주를 마셨다. 소주를 2병 마셨더니 술기운이 제법 올라왔다.

 

공칠은 한국사람에게는 소주가 최고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양주나 포도주, 막걸리, 정종 그 어떤 술도 소주와 같은 담백한 맛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소주는 그야말로 맑은 물, 정화수와 같다.

 

옛날 나이 든 어머니들이 새벽에 일어나 우물에서 차가운 맑은 물 한 그릇을 떠놓고 두 손을 비비면서 간절하게 소원을 빌던 그런 물과 같은 투명하고 깨끗하고 영혼이 들어있는 액체다.

 

다른 술처럼 취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술과는 차원을 달리한다. 공칠이 싫어하는 것은 그래서 막걸리와 같이 혼탁한 술이었다. 막걸리에는 무언지 모르게 이질적인 것이 뒤섞여있는 것같다.

 

순수성을 상실한 처녀와 같았다. 포도주도 마찬가지였다. 피와 같은 색깔이 싫었다. 화이트 와인이나 맥주는 오줌을 연상시켜 못마땅했다. 그런 의미에서 양주도 마찬가지였고, 더군다나 양주는 여자를 유혹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인식된 것도 이상한 일이었다.

 

공칠은 소주를 마시는 것은 곧 맑은 영혼을 가슴에 담는 신성한 일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소주를 마실 때에는 조상 제사를 지내고 마시는 음복처럼 경건한 자세로 마셨다.

 

술에 취한 상태에서 공칠은 식당을 나와 걸었다. 가슴 속으로 오월의 상긋한 바람이 파고들어왔다. 그 바람은 여인의 손길이었다. 지하철을 타기 위해 역에서 에스컬레이터를 탔다. 난간을 잡고 눈을 감았다.

 

저절로 밑으로 내려간다. 에스컬레이터가 덜커덩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가벼운 움직임을 음미하며 삶의 본질에 다가가려고 애썼다. 그러다가 눈을 떴다. 순간 반대편 에스컬레이터에서 올라오는 젊은 여자가 눈에 들어왔다. 눈에 확 띄는 미모였다.

 

그런데 그 여자 바로 뒤에서 어떤 남자가 핸드폰으로 여자의 치마 밑을 사진 찍는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 공칠은 순간적으로 직업의식이 발동했다. 빠르게 에스컬레이터를 뛰어 내려가서 거꾸로 올라가고 있는 에스컬레이터로 옮겨탔다.

 

그리고 그 남자를 붙잡았다. 앞서 가던 여자는 주변에 있는 다른 남자에게 부탁해서 세워달라고 했다. 공칠이 빠른 속도로 그 남자에게 다가가자 그 남자는 이를 눈치채고 달아나기 시작했다.

 

거의 그 남자를 붙잡을 상황에서 공칠은 술에 취해서 비틀거리면서 넘어졌다. 공칠은 넘어지면서 주변 사람들에게 악을 쓰고 외쳤다. “강도야! 저놈 잡아요. 강도예요.”

 

그러자 길을 가던 고등학생 두 명이 필사적으로 그 남자를 추격했다. 마침내 그 남자는 고등학생들에게 붙잡혀서 공칠이 있는 곳으로 끌려왔다. 공칠은 넘어져서 무릎이 무척 아팠다. 순간적으로 화가 났다. “이 나쁜 놈! 너 때문에 내가 크게 다쳤잖아! 이리 와 봐.”

 

공칠은 그 남자를 때리려고 했다.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라는 탈리오의 법칙에 따라 공칠은 그 남자의 무릎을 세게 발로 찼다. 그 남자는 무릎을 걷어차이자 앞으로 넘어졌다. 하지만 잘못한 것이 있어서 그런지 그 남자는 대항하지 못했다.

 

그 남자를 붙잡은 고등학생들은 경찰에 신고를 하고 있었다. “112. 여기 길에서 강도를 붙잡았어요. 강도가 피해자를 때려서 크게 다친 모양이예요. 빨리 와주세요.”

 

고등학생들은 공칠이 강도사건의 피해자인 줄 알았고, 그 남자가 강도범으로서 체포를 면탈할 목적으로 공칠을 폭행한 것으로 잘못 알았던 것이었다.

 

그 남자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자, 경찰순찰차가 나타났다. 출동한 경찰관은 강도상해사건으로 신고가 접수되었기 때문에 가스총까지 꺼냈다.

 

그 남자는 영문도 모르는 상태에서 수갑이 채워졌다. 공칠은 사건의 경위를 설명했다. 그리고 곧 바로 지하철역에서 나오는 에스컬레이터 부근으로 돌아가서 그때까지 현장에서 기다리고 있던 젊은 여성을 만났다.

 

그 여성은 주변 사람들이 어떤 치한에 의해 신체 일부가 불법촬영되었다는 사실을 전해듣고 공칠이 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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