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의 애인을 친구에게 빼앗기고 트라우마를 겪다

 

“무척 피곤해 보여요.”

“괜찮아. 손님이 많아서 하루 종일 바빴어. 잘 있었어?”

“네”

“식당은 괜찮아?”

“불경기라 손님이 많이 줄었어요.”

“하긴 요새 다 그렇다고 그래. 웬만한 곳은 현상유지도 어렵대.”

“힘들어도 참고 열심히 해야지요.”

 

혜경의 밝은 모습이 맘에 들었다. 항상 미소를 띠고 모든 일을 긍정적으로 보고 있었다. 강남에 일식당을 오픈할 때부터 주위에서는 걱정을 많이 했지만, 그래도 꿋꿋하게 잘 하고 있다. 워낙 열심히 노력을 하고, 타고난 감각이 있어서 그런지 꾸준히 손님이 있었다. 자신이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타입이었다. 한눈을 팔지 않고, 자신의 직업이 세상에서 가장 좋고 보람 있는 일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래서 일을 재미있어 했다. 하루하루 재미있게 보내다 보니 너무 빨리 지나간다는 것이었다.

 

저녁 식사를 하고, 이태원에 있는 술집으로 갔다. 미군 부대가 평택으로 이전하기 전과는 많이 다르지만, 이태원은 역시 이태원이다. 아직도 일부 부대가 남아있고, 외국인 주거지역이 많이 있기 때문에, 영어로 된 간판이 많고, 외국거리 같은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젊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분위기 있는 술집으로 가서 두 사람은 술을 마셨다. 혜경이 먼저 술에 취했다. 오늘 따라 말을 많이 했고, 왠지 기분이 좋아 보였다. 윤석에게 자신은 하얏트 호텔에서 자고 갈 테니 먼저 들어가라고 했다. 윤석은 알았다고 하면서 택시를 잡아 하얏트 호텔로 갔다. 호텔 방을 하나 잡아주고 올라가서 쉬라고 했다. 혜경은 술에 취한 상태에서 룸으로 올라갔다. 윤석은 로비라운지에서 창밖의 야경을 보고 있었다. 혼자서 조용히 커피를 마시고 싶었다.

 

 

하얏트 호텔 로비라운지에서 보는 한남동의 풍경은 정말 아름답다. 로비에서는 피아노 연주를 하고 있었다. 피아니스트는 "Moon River"를 연주하고 있었다. 창밖으로 보름달이 떠있었다. 윤석은 이 노래를 참 좋아했다. 1961년 조니 머서가 가사를 쓰고, 헨리 맨시니가 곡을 만든 것으로서, ‘티파니에서 아침을(Breakfast at Tiffany's)’이라는 영화의 주제가였다. 그 영화에서 여주인공 오드리 헵번이 창가에서 그 노래를 부르고 있는 장면은 정말 아름답고 감동적이다. 윤석은 이 노래를 들을 때마다, 오드리 햅번의 그 청순한 표정을 늘 떠올리곤 했다.

 

한 시간쯤 지난 다음, 혜경에게 전화를 했다. 잘 자라는 말을 하려고 했다. 혜경은 울고 있었다. 알았다고 하면서 조심해 들어가라고 했다. 그리고 전화를 끊었다. 윤석은 그런 전화를 받고 집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일단 집에 전화를 해서 정현과 술을 마시고 있으니 먼저 자라고 했다. 혜경의 방으로 올라갔다. 혜경은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다시 내려왔다.

 

다시 이태원으로 가서 혼자 술을 마셨다. 혜경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윤석은 마음이 아팠다. 갑자기 왜 그러는지 알려주지도 않고, 혼자 이상한 행동을 하는 것이 궁금했다. 윤석에게는 마음을 열지 않고, 상의도 하지 않으려는 태도가 서운했다. 하지만 혜경의 처분만 기다릴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혜경은 대학교 3학년 때 정말 좋아했던 남자 친구가 있었다. 그런데 그 남자는 6개월 만에 혜경의 가까운 여자 친구와 애인이 되면서 혜경을 멀리했다. 그때 받은 충격은 정말 대단했다. 자신이 좋아했고, 순수한 첫사랑이었고, 첫 경험이었다. 물론 그 남자 친구와 혜경의 여자 친구는 그 후 헤어졌지만, 혜경은 이 일로 인해서 남자에 대한 인식이 크게 달라졌다. 남자로부터 받은 트라우마가 무의식을 짓누르고 있었다. 그래서 남자를 믿지 않게 되었고, 섹스에 대한 관념도 무뎌졌다.

 

혜경이 대학을 졸업할 무렵 아버지 사업이 부도가 났다. 아버지는 사기를 친 것도 아닌데, 단지 부채를 갚지 못한다는 이유로 채권자들이 집요하게 형사고소를 하는 바람에 억울하게 감방까지 갔다 왔다. 징역을 1년 6개월 살면서 다른 사람들은 초범이라고 가석방으로도 나오는데, 아버지는 하루도 빼지 못하고 꼬박 다 징역을 살고 나왔다. 아버지가 교도소에 있는 동안 혜경은 아버지 옥바라지부터 병든 어머니, 동생 2명에 대한 부양책임을 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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