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텔방에서 사장과 단 둘이서 여비서가 술을 마시다

 

혜경은 자신에게 심부름을 시키고, 그것도 사장 혼자 있는 호텔 방으로 가져다 달라는 것이 못마땅했다. 같이 따라간 남자 직원도 있는데, 왜 하필 여자에게 약을 사가지고 오라고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사장은 가난한 집에서 열심히 노력해서 자수성가한 사람이었다. 의지가 강했고,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다. 성격이 급하고 무서운 사람이었다. 어려운 환경에서 성공한 사람들은 대개 자존심이 강하고, 다른 사람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혼자 노력해서 출세했기 때문에, 일이나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은 사람을 무시한다. 머리가 나쁘다고 생각하거나, 의지가 약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열등한 인간으로 본다.

 

약과 서류를 들고 가자, 사장은 목욕가운만 걸치고 있었다. 민망했다. 호텔방에서 남자와 단 둘이 있는데, 그것도 목욕가운만 입고 쇼파에 앉아 있으니 이상했다. 혜경은 서류를 건네주고 바로 나오려고 했다. 사장은 쇼파 맞은편에 앉으라고 했다.

 

서류를 보면서 몇 가지 지시를 했다. 그러나 막상 지시하는 내용은 혜경이 할 일도 아니었고, 그 늦은 시간에 처리해야 할 급한 사항도 아니었다. 그냥 혜경을 부르기 위한 핑계로 보였다.

 

사장은 약을 먹을 물을 가져오라고 했다. 자신이 냉장고에서 꺼내 마시면 되는 것인데, 혜경에게 시켰다. 해외에 나와서까지 한국에서처럼 여비서로 생각하고, 이런 저런 잔심부름을 시키는 것이었다. 혜경은 하라는 대로 했다. 어쩔 수 없었다. 크게 거부반응도 없었다.

 

자신이 모시는 사장이 외국에 출장 와서 술을 많이 마시고, 속이 좋지 않아 약을 사달라고 하고, 서류를 가져다 달라고 하고, 약을 먹기 위해 물을 가져다 달라고 하니, 그 정도야 있을 수 있겠다 싶어서 그냥 시키는 대로 했다.

 

 

그런데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사장은 밖에서 사가지고 온 와인을 함께 마시자고 했다. 순간, 몹시 당황스러웠다. 물론 혜경 자신도 그날 저녁 식사 때 사케를 마셨다. 많이는 아니지만, 술에 약간 취한 상태였다. 방에 들어가 샤워를 하려고 하는데, 사장의 전화를 받은 것이었다.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하지? 호텔방에서 단 둘이서 와인을 마시고 있으면 이상하지 않을까?’ ‘큰일이네. 같이 간 다른 남자 직원들이 알면 오해를 할 텐데.’

그러나 싫다는 말을 꺼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사장이 하자는 대로 함께 와인을 마셨다. 마침 그곳에는 와인 안주도 있었다.

 

“자. 편하게 앉아서 술이나 마시자. 아무 걱정하지 말고. 회사에서 근무하면서 애로사항이 있으면 말해 봐. 다 해결해 줄 테니. 결혼은 언제 할 거지?”

“아직 결혼할 생각은 없어요. 일이나 열심히 하려고요. 사장님께서 잘 해주시니까 고맙습니다.”

“그래. 요새는 빨리 결혼하는 게 능사가 아냐. 사회생활에서 성공하는 게 중요하지. 괜히 능력 없는 남자 만나 고생만 하고, 애나 키우면 여자는 자신의 인생이 없는 거야.”

“예. 맞아요. 저도 결혼은 나중에 생각하려고요.”

 

“그런데, 얼마 전에 들었는데, 사귀는 애인이 유부남이라는 소리를 들었어. 유부남은 만나지 않는 게 좋아. 잘못하면 망신당하고, 골치 아파. 원하면 좋은 데 중매를 해줄 게.”

혜경은 갑자기 망치로 뒤통수를 세게 맞은 것 같았다. ‘아니 어떻게 사장이 그런 사실을 알았을까? 회사에서 누가 그런 소문을 퍼뜨린 걸까?’

 

 

혜경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한 달 전부터는 지금 만나고 있는 순현과 헤어지려고 마음먹고 있는 상태였다. 이유는 성병을 옮겼기 때문이었다. 병원에 가서 창피를 무릅쓰고 치료를 받았다. 그때 순현에게 따졌다.

 

“아니, 나를 만나면서 또 다른 여자와 관계를 하고, 성병까지 옮겨요? 이제 더 이상 만나지 말아요.”

“무슨 소리야? 나는 다른 여자와 전혀 하지 않았어. 당신이 다른 곳에서 옮겨온 거지?”

순현은 오히려 혜경에게 뒤집어씌우면서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고 나섰다. 그러면서 혜경에게 바람 피는 여자라고 난리를 쳤다.

 

혜경은 기가 막혔다. 그러나 누가 먼저 성병을 옮아가지고 상대에게 옮겼는지 의학적으로 증명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혜경에게는 강제로 조사할 권한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일 이후 혜경은 관계를 할 때 콘돔을 사용했고, 가급적 성관계를 하지 않으려고 했다.

 

갑자기 두 사람 관계는 냉각되었고, 애정은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잘못했다가는 에이즈에 걸려서 치명적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갑자기 딱 끊을 수 없는 것은 여전히 순현의 경제적 도움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순현이 성병에 걸려 혜경에게도 옮겼으면, 당연히 순현의 부인에게도 옮겼을 것이고, 그렇다면 그 부인이 난리를 쳤을텐 데, 전혀 그런 이야기는 나오지 않았다. 그 이유는 순현의 말대로 순현은 집에서는 절대로 관계를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일까? 그런 생각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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