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에 취한 사장을 침대에 데려다놓고 여비서는 호텔방을 빠져나왔다

 

여기까지 이야기를 하다가 사장은 술에 취해 고개를 떨구었다.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했다. 아마 못 이룬 옛사랑 이야기를 하다 보니 자기도취에 빠져 술이 급하게 올라온 모양이었다. 쇼파에서 쓰러진 모습을 보니 늙은 사자 한 마리가 자고 있는 것 같았다.

 

무한경쟁의 삭막한 초원에서 맹목적으로 먹이 사냥이나 하고 가끔 욕정이 발동하면 암사자를 공격하고 그러다가 기운이 빠져 더 이상 사냥도 교미도 하지 못하는 노쇠한 사자였다. 얼마 있지 않으면 사자 무리에 끼지도 못하고 뜨거운 뙤약볕에 쓰러져 생을 마감할 것처럼 보였다.

 

혜경은 그런 사장의 모습이 불쌍해 보였다. 아무리 젊었을 때 고생을 하고, 산전수전 다 겪고, 비록 사업을 잘 해서 돈을 벌고 있다고 해도, 수많은 여자를 껴안았다고 해도, 나이 들어 늙고 기운이 빠지고, 얼굴에 주름살이 많이 잡힌 한 남자로 보이니 동정의 대상이었다.

 

혜경은 사장의 이야기를 듣고, 갑자기 남녀 사이의 관계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사장이 혜경의 남자 친구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고, 기분이 이상해졌다. 자칫 잘못하면, 비서로 근무하는 것도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혜경이 무슨 사무능력이나 경험이 있어서 비서로 근무를 시킨 것도 아니고, 인물이나 몸매가 낫기 때문에 그런 것 같은데, 남자 친구가 있고, 그것도 유부남과 연애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 확인되면, 사장 성격에 그대로 둘 것 같지 않다는 위기의식도 느껴졌다.

 

 

그래서 더욱 더 그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최근에 순현과의 관계도 별로 좋지 않게 된 점도 작용해서 술에 취하고 싶었다. 사장이 권하면 사양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마셨다. 사장도 많이 취하고, 혜경도 많이 취한 상태가 되었다.

 

점점 시간이 흐르자, 혜경의 눈에 사장이 나이 먹고 늙은 사람이 아니라, 별로 나이 차가 없는 건강한 남자, 멋이 있고, 능력 있는 남자로 보였다. 사장은 운동을 많이 해서 그런지, 팔다리 근육도 단단했다. 돈이 많아 모든 것이 명품이었고, 옷도 아주 비싼 것이었다.

 

넥타이도 몇 십만 원씩 하는 외제 명품이었다. 특히 사장은 사람들에게 로렉스 시계 자랑을 하곤 했다. 혜경이 사장실에 차를 가지고 들어가면 사장은 손님들에게 3천만원 주고 면세점에서 사온 것이고, 그것도 재일교포를 통해 사왔다고 떠벌렸다.

 

그래서 그런지 사장은 혜경의 첫사랑의 남자처럼 오버랩 되기도 했다. 지금 만나고 있는 순현의 이미지도 떠오르기도 했다. 그러다가 아버지, 어머니, 남동생의 얼굴도 떠올랐다. ‘그들은 내가 이렇게 흐트러지는 것을 원치 않을 것이다. 똑바로 행동하고, 나의 몸과 정신을 지키고, 열심히 직장생활을 하기를 바랄 것이다.’ 이런 생각에 미치자 순간적으로 술이 깨는 것 같았다. 그래서 일어나려고 했다.

 

죄송해요. 아무래도 안 되겠어요. 술이 취해서요. 제 방으로 갈게요. 편히 쉬세요.”

혜경은 비틀거리면서 일어났다. 사장은 가지 말라고 중얼거리면서, 술에 취해 쇼파에 쓰러졌다. 그런 상황에서 그냥 나올 수가 없었다. 잠시 쇼파에 앉아 정신을 차리려고 애썼다. 한편으로 사장이 불쌍해 보였다. 나이 든 사람이 회사를 경영하느라고 얼마나 힘이 들까? 스트레스도 많을 것이다. 저렇게 술에 취해 자면 속도 아플 테고, 고통스러울 것이다.

 

혜경은 그대로 앉아 있다가 사장을 깨워서 침대로 옮겨주려고 했다. 그러다가 쇼파에 앉은 채로 잠이 들었다. 30분쯤 지나 화장실에 가려고 잠이 깼다. 화장실을 다녀온 혜경은 사장을 흔들어 깨웠다. 자신의 힘으로는 사장을 들어서 옮기는 것은 불가능했다. 사장은 겨우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서 혜경의 부축을 받고 침대로 이동했다.

 

그런데 침대에 가서는 혜경을 꼭 붙잡아 당기는 것이었다. 혜경은 아차 싶었다. 뿌리치려고 했지만 사장의 힘이 너무 강했다. 사장은 침대에 누워 혜경의 손만 붙잡고 있었을 뿐,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깊은 잠에 빠졌다. 혜경은 사장이 완전히 잠든 것을 확인하고, 조용히 방문을 열고 복도로 나왔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한 층 아래층에 있는 혜경의 방으로 들어갔다.

 

창밖으로 동경의 밤이 눈에 들어왔다. 호텔 주변에는 화려한 네온사인이 많이 켜져있었다. 혜경은 사장 앞에서 너무 많이 술을 마신 것도 후회가 되었다. ‘나를 얼마나 우습게 볼까?’ 술에 취해 샤워도 하지 못하고, 그냥 옷만 벗고 침대에 들어가 곯아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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