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에 사랑했던 여자, 지금은 달라진 상황에서 다시 사랑할 수 있을까?>
“요새 세상이 너무 시끄럽지 않아?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도통 모르겠어. 코로나사태도 언제 끝날지 모르고, 그나저나 경제가 너무 불황이라 걱정이 돼. 잘 지내고 있었어?”
“응. 나는 사무실에서 일만 하고 있으니, 정치나 경제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잘 몰라. 워낙 일이 바쁘니까. 내가 하는 일은 수사를 하는 게 전부야.”
“요새 유미를 다시 만나고 있다면서? 유미는 잘 지내고 있는 거야?”
“지금 유미 상황이 안 좋아. 그래서 걱정이야.”
“어떻게 되었는데?”
“유미는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잘 살고 있었는데, 남편이 교통사고로 죽었어. 그래서 혼자 생활하고 있었는데, 이번에는 유방암에 걸렸대. 아주 심하게 고생을 하고, 깊은 절망에 빠져 있어.”
“그래서? 어떻게 하려고? 네가 책임질 수 있는 상황은 아니잖아?”
“나보고 책임을 지라고 하는 건 아냐.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으니까 걱정하는 거고. 어떻게 도와줘야 할지 모르니까 답답한 거야.”
“처음부터 힘이 들더라도 유미와 결혼했어야 해. 그게 뜻대로 되지 않았기 때문에 모든 게 꼬이고 어렵게 된 것이지. 아무튼 잘 해줘. 불쌍하잖아? 유미처럼 착한 사람도 없지.”
정현은 갑자기 마음이 울적해졌다. 비도 오는데 유미 이야기가 나오니 가슴이 답답해졌다. 술을 많이 마셨다. 취기가 올라오자 멍하니 창밖을 보고 있었다. 커다란 유리에 빗방울이 떨어지는 것이 마치 공룡의 눈물 같았다. 갑자기 유미가 보고 싶었다. 유미를 만나 무언가 하소연하고 싶었다. 유미로부터 위로받고 싶었다.
“너는 혜경이를 어떻게 하려고 해?”
“무얼 어떻게 해. 그냥 만나는 거지. 무척 외롭고 힘이 든 모양이야. 그래서 가끔 만나 위로해주고, 도와줄 일이 있으면 도와주려고 하는 것 뿐이야. 어차피 처음부터 우리는 서로 연애한 것도 아니고, 그냥 아르바이트 제자였을 뿐이었어. 혜경이가 나를 사랑한 적도 없고, 지금도 마찬가지야.”
“그래, 혜경이는 원래 너무 예뻤어. 서울 아가씨라 너를 우습게 봤던 거지. 그때 네가 너무 일방적으로 혜경에게 빠져서 고생을 많이 했지. 너 혼자 좋아한 거지, 하지만 내 눈에는 별로였어. 바람기도 많아 보였고, 머리속에 든 것도 없어 보였어.”
“그건 네가 잘 몰라서 그래, 혜경이는 그렇지 않아.”
정현은 윤석을 먼저 보낸 다음 로비라운지로 갔다. 창가에 앉아 어두워진 밤하늘과 바깥 풍경을 보고 있었다. 술기운이 강하게 솟구쳤다. 정신은 아주 또렷했다. 로비라운지 중앙에 있는 그랜드 피아노에서는 월광소나타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피아노 치는 여자 모습이 유미와 오버랩되고 있었다. <월광소나타>는 곡도 좋지만, 제목이 더 좋았다. 누가 그런 제목을 붙였는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月光>이라는 단어가 멋이 있었다.
<日光>이라는 단어도 있지만, 그것은 매우 강렬하고 직선적이며 비인간적이다. 뜨거운 햇볕 아래에 비키니 차림으로 해변을 걸어도 그곳에서 건강미는 찾을 수 있어도 운치나 센치멘탈은 찾을 수 없다.
어두워지고 파도가 잠잠해지며 오직 달의 빛에 의지해서 백사장을 걷고 있으면 자연히 어머니 자궁 속으로 되돌아간다. 그곳에서 외부의 소음을 차단하고, 진한 커튼을 치고 혼자만의 시간을 갖는다.
태아는 독립한 공간에서 자신에게 생명을 부여한 모(母)에게 영양분을 공급받기 위한 굵은 줄에 연결되어 의지하고 있지만, 오직 자신만을 인식하고 사랑한다. 사랑의 유일한 대상은 태아 자신뿐이다. 태아의 존재는 자궁 안에 있는 시간에 대한 관점으로부터만 파악된다.
자궁을 탈출하는 순간, 그는 이미 태아가 아니다. 영광스러운 태아의 지위를 박탈 당하고, 세상에 내팽겨쳐진다. 그러니까 인간은 원래 출발지점에서부터 혼자였고, 고독을 운명처럼 몸에 지닌 것이다.
나중에 고독에서 벗어나려고 사랑이라는 이상한 몸부림을 쳐보지만, 사랑의 끝에는 언제나 처음보다 더 진한 고독이 불쌍한 인간을 집어삼키려고 숨어서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어두운 바다, 칠흑 같은 밤에 백사장에 홀로 서있는 인간은 다시 태아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다.
온 천지에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자신은 아주 작고 초라하다. 자신의 생명은 오직 자신만이 지켜야 한다. 바다는 잠시도 쉬지 않고 출렁이는 거대한 물결, 파도로써 태아인 자신이 살아있음을 깨우쳐주는 어머니의 <양수>와 같다.
여기에서 고독은 <고통>이 아니라, <편안함>이며, <나>의 본질적 구성요소가 된다. 이때 구름에 가렸던 달이 빛을 보낸다. 그리고 파도는 곧 이어, <월광소나타>를 나에게 선물로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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