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지만 공부 때문에 사랑에서 진도를 더 이상 나가지 못하다>

 

정현은 다시 옛날로 돌아가 유미와 지내던 시간을 떠올렸다. 정현은 공부를 하면서도 유미와 가끔 만났다. 만나면 특별히 하는 일은 없었다. 둘이서 남산을 걸었다. 걸으면서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대화를 통해 서로에 대해 너무 많은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면서 서로를 위로하고 공감했다. 같이 있다가 헤어지면 또 보고 싶었다.

 

정현은 자신이 마치 피아노를 전공하는 사람처럼 피아노에 몰입했고, 유미 또한 자신이 법학공부를 하는 것처럼 로스쿨생을 이해했다. 정현은 어떠한 일이 있어도 변호사시험에 붙어야 한다는 의지를 강하게 내비쳤고, 유미는 꼭 그러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시험은 상대적인 것이기 때문에 운이 좋아야 붙는 것이며, 변호사시험에 너무 목숨을 거는 것은 좋지 않다고 말했다.

 

정현은 나름대로는 열심히 공부했지만, 변호사시험에 떨어졌다. 로스쿨을 졸업한 다음 해 부활절 바로 전날 유미를 만났다. 두 사람은 함께 술을 마셨다. 술에 취한 정현은 자신의 초라함을 솔직하게 고백했다. 대부분의 친구들은 시험에 붙었는데, 자신은 갈수록 시험에 대한 자신이 없어진다고 했다.

 

유미에게도 자신이 없고, 일단 헤어지자고 했다. 좋은 사람을 만나라고 했다. 그러면서 눈물을 흘렸다. 유미도 따라 울었다. 유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고개를 끄덕이지도 않았다. 몇 시간이 지난 후 정현이 술에서 깨어보니, 어느 작은 모텔방이었다.

 

 

정신을 차리고 불을 켰더니 유미는 쇼파에 앉아 자고 있었다. 술 때문에 속도 아프고 머리도 아팠다. 정현은 깜짝 놀랐다. 미안했다. 서둘러 유미를 데리고 밖으로 나왔다. 아직 새벽이었다. 두 사람은 차가운 공기를 맞으며 한참 동안 걸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정현은 택시를 잡아서 유미를 집까지 데려다주었다. 유미는 차에서 내릴 때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냥 굳은 표정으로 내려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집으로 들어갔다.

 

정현의 고등학교 친구 영식으로부터 오랜만에 전화가 왔다. 너무 괴롭다고 하면서 술이나 한 잔 하자고 했다. 술에 취한 상태에서 영식은 자신이 겪고 있는 일을 털어놓았다. 영식은 1년 전에 경희를 우연히 만났다. 사람은 아주 우연한 기회에 어떤 사람을 만나 생각지도 않았던 관계를 맺게 되고, 그것이 인연이 되어 삶의 방향이 완전히 바뀌기도 한다.

 

사람의 운명이란 정말 한치 앞을 내다보지 못한다. 길을 나섰다가 교통사고를 당해 비명에 가기도 하고, 암에 걸려 모든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기도 한다. 억울한 누명을 쓰고 긴급체포되어 징역을 살고 나와 보니 사업체는 부도나서 산산조각이 나있는 경우도 있다.

 

대통령이라는 최고의 자리에 올랐던 사람도 어느 날 구속되어 감방에 간다. 고위공직자도 어느 날 갑자기 어떤 사람이 TV에 나와서 폭로를 하면, 얼마 있지 않아 징역을 산다. 모두들 이런 일이 있으리라고 상상이나 했을까? 믿었던 사람에게 사기를 당해 아이들은 학업을 중단해야 하고 지하실방에서 고생하는 왕년의 사장도 있다.

 

헝가리 부다페스트 다뉴브강에서 한국인 33명이 탄 소형 유람선 허블레아니를 대형 크루즈선이 들이받았다. 유람선은 받힌 지 불과 7초만에 침몰했다. 사람은 이처럼 전혀 상상할 수 없는 사고를 당하기도 한다. 따지고 보면 그다지 길지도 않은 인생이지만, 막상 살아보면 결코 짧지도 않고, 영고성쇠가 끊이지 않는 험하고 험한 고행길이다.

 

 

어느 날 영식은 회사 일을 예정보다 빨리 마치게 되었다. 회사에는 다시 들어가지 않아도 되었고, 그렇다고 집에 일찍 들어가 할 일도 없었다. 그런 금요일 오후에 사람들은 마음이 공허해진다. 친구들을 만나 술을 마시는 일도 별로 재미가 없다. 되풀이되는 일상의 일들이란 다람쥐 쳇바퀴 도는 것이다. 얼마나 재미없이 살아가는 것일까?

 

물론 이런 공허감을 느끼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도 많다. 어쩌면 바쁘게 지내고 보람을 느끼면서 하루하루를 지치지 않고 사는 사람들이 더 많을지 모른다. 그러나 적지 않은 사람들이 영식과 같이 보내고 있다. 직장일이나 하고 집에 오면 TV나 본다. 식사하고 일상의 대화나 하고 신문이나 보고 잔다. 가끔 운동을 하기도 하지만 그렇게 열심히 하지도 않는다. 다이어트를 해야 한다고 하면서 매일 야식을 거르지 않는다.

 

대학교를 나온 사람이 집에서 책 한권 읽지 않는다. 주로 스포츠 경기 관람에 취미가 있고, 북한 비핵화문제나 부동산투기억제대책, 최저임금, 택시카풀분쟁 같은 시사적인 문제, 정파싸움 같은 문제에만 관심이 있다. 나머지는 돈 버는 방법, 재테크하는 방법에 골똘히 머리를 쓰고, 평생 시집 한권 사지 않는다. 소설은 그냥 인터넷을 통해 누구 소설이 유명한지, 그 스토리가 어떤지 정도만 상식선에서 파악하고 넘어간다.

 

문학이나 예술은 고등학교 때 배운 것이 전부다. 그림도 취미가 없고, 음악도 대중가요를 따라 부르는 정도다. 쇼팽의 피아노소나타나 클래식에는 전혀 아는 바가 없다.

 

<공부 때문에 사랑을 포기하는 사람들도 있다. 당장 절실한 삶의 문제에 매달려 가장 근원적이고 중요한 사랑을 놓치는 것이다. 하지만 일단 사랑을 놓치면 그런 사랑은 두번 다시 오지 않는다. 사랑의 대용물만 의미 없이 나타났다가 다시 썰물처럼 나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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