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부녀와 모텔방에서 남편에게 발각된 남자의 비참한 심정은 어떠할까?
영식은 경희의 남편과 그 일행, 모텔 종업원, 세 남자를 보면서 오직 자신만이 가장 추락한 불쌍한 존재로 인식되었다. 자신은 이미 남자의 대열에서 이탈한 초라한 존재가 된 것이었다. 왜 이런 상황이 되었을까? 왜 이렇게 추잡한 존재로 추락했을까? 섹스라는 것이 매우 더럽게 느껴졌다. 구역질나는 것이었다. ‘순간적인 쾌락을 위해, 내가 왜 이렇게 위험한 일을 했던 것일까?’
자신은 인격도 없는 하등동물로서 그냥 세포만 살아서 움직이고 있는 존재로 느껴졌다. 사람의 인격은 배우고, 스스로 절제하고, 바르게 살아야 형성되는 것이다. 나체 상태에서 음부를 노출시킨 상태에서는 인격조차 찾아볼 수 없다. 그래서 영식은 지금 인격을 상실한, 아니 애당초 인격이 없었던 비인격자 내지 무개념자로 전락해 버린 것이었다.
유부남과 유부녀가 서로 사랑을 나누고 있다. 그들은 무방비상태다. 자신의 배우자들이 무엇을 의심하고, 은밀한 관계에 대한 증거를 확보하기 위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전혀 모르고 있다. 아니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주의를 하지 않고 있다. 만약 들켰을 때 어떤 결과를 가져올 것인지,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다.
오직 몸과 마음이 움직이는 대로 사랑의 감정을 나누고, 육체적인 쾌락과 순간적인 쾌감을 느낄 자유와 권리가 있다고 방심한다. 그러다가 갑자기 쓰나미가 들이닥친다. 화산이 폭발하고 성난 이리떼가 달라들어 물어뜯는다. 그게 법과 현실의 괴리다. 윤리규범과 상식적인 법감정의 차이다.
경희는 나름대로 많은 것을 갖춘 젊은 여자다. 교양도 있고 센스도 있고, 성관계에 있어서도 영식에게 많은 것을 주었다. 남자라면 그런 여자를 보호해주어야 한다. 어떤 상황에서든지 위해로부터 막아주어야 한다. 그렇지만 갑자기 닥친 상황에서 남자는 올바른 판단을 하기 어렵다.
영식은 이 상황에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랐다. 남편 앞에서 벌벌 떨고 있는 경희를 보호해야 한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원망스럽기도 했다. 그게 이중성격이다. 일이 잘못되면 두 가지 측면에서 사물을 바라보는 이분법적 사고방식을 취한다. 감사와 원망, 이 두 가지는 항상 따라다닌다. 두 가지 감정 중 어느 하나가 우세하면 다른 한 쪽은 묻혀 버린다. 그냥 사라져 버린다.
남편이 의심하고 뒤를 쫓는다는 것을 예상했으면 당연히 자신에게 이야기해 주고, 만나지 말든가 더 조심했어야 한다는 식으로 경희를 탓했다. 그때까지 영식은 경희로부터 남편이 의심하고 뒤를 쫒고 있다는 사실에 관하여 아무런 말도 듣지 못했다. 물론 경희 자신도 남편이 자신을 의심하고 사람을 시켜서 현장까지 잡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일체 그런 말을 꺼내지 않았던 것이다.
영식은 유부남이었지만 경희를 만날 때 자신의 부인이 경희 남편처럼 크게 문제 삼을 것 같지는 않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영식은 경희의 경우는 다르다고 믿었다. 경희 남편의 성격이나 예상되는 행동은 오직 경희만이 잘 알고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경희로서는 영식을 만날 때, 적어도 경희 남편이 경희가 바람을 피는 것을 알게 되면 어떻게 나오리라는 것을 예상했어야 하고, 그래서 더욱 조심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영식이 이런 상황에서 경희를 탓하는 것은 인간의 속성이 원래 그렇기 때문이다. 태초부터 사람들은 남의 탓을 하기 시작했다.
아담과 이브가 에덴의 동산에서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으로부터 질책을 받게 되자 아담과 이브는 뱀의 탓과 먹으라고 권한 이브의 탓을 했다. 아담은,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하게 하신 여자가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라고 변명했다.
이브는,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라고 뱀의 탓으로 돌렸다(창세기 3장 12절-13절). 아담과 이브는 그와 같은 변명을 하고 남의 탓을 지적했음에도 불구하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났다. 그 이후에도 사람들은 일이 잘못되면 끊임없이 남의 탓을 한다. 잘 되면 내 탓, 잘못되면 네 탓이다.
불과 몇분 전까지만 해도 전혀 상상할 수 없었던 영화 속의 장면이 현실화되었고, 영식은 그 주인공이 되었다. 사람은 순간적으로 추락한다. 본래 추락은 예고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비행기가 추락하는 것도 그렇고, 등산을 갔다가 발을 잘못 디뎌 추락하는 것도 그렇다.
고위 공무원이 뇌물사건으로 구속되면서 검찰청 앞에서 사진을 찍히는 것도 순간적인 추락이다. 이미 예고되어 있다면 그건 추락이 아니다. 추락의 순간성 때문에 인간은 순식간에 파멸되고 만다. 추락은 적당한 아픔을 주는 게 아니라 콘크리트 바닥에 개구리를 메다 내치는 것 같은 결과를 가져온다. 즉시 사망이라는 치명적인 결과가 추락의 본질이다.
설사 목숨은 건진다고 해도 치명적인 상처가 주는 공포는 죽을 때까지 잊혀지지 않는다. 자다가도 벌떡 벌떡 일어나게 만든다. 수시로 가위에 눌리고, 자신의 실존에 커다란 문신을 해놓고, 무거운 바위를 메달아놓은 것처럼 추락의 상흔은 영원히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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