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폭포 속에 있었다

 

 

 

 

갑자기 경상북도 울진군에 다녀 올 일이 생겼다. 서울에서 살다보면 경상북도는 참 먼 곳이다. 자주 갈 일이 별로 없다. 아주 먼 곳처럼 느껴지는 것은 그 때문이다. 옛날 나는 해인사 원당암과 길상암에서 고시공부를 했다. 그후 1986년도에 대구에서 잠시 근무를 하기도 했다. 그런데도 지금 가면 경상도 지방은 꽤나 낯선 동네에 속한다.

 

주말을 이용해서 머리도 식힐 겸 여행을 떠났다. 아무런 준비도 없이 떠나는 주말여행이었다. 그런 여행도 나름대로 묘한 맛이 있다. 잘 모르는 곳을 가본다는 데에 대한 호기심도 생기고, 꽉 짜여진 스케줄 없이 자유스럽게 돌아다일 수 있어 특별한 낭만도 얻게 된다.

 

서울에서 볼 일을 보고 나니 금요일 저녁이 되었다. 토요일 출발하는 것 보다 금요일 늦게라도 떠나는 것이 나을 것 같아 저녁 8시경 출발했다. 당초 예정은 경주까지 가려고 했으나, 중간에 대전을 지나니 비가 계속해서 오고 캄캄한 고속도로를 달리는 것이 위험해 보였다. 

 

대전을 지난 경부고속도로는 확장보수공사로 인해 시속 80킬로미터로 제한되어 있을 뿐 아니라 굴곡이 심해 빗길야간운전은 힘이 들었다. 경부고속도로는 대전 대구 구간이 아주 노후되고 어수선하다. 일단 쉬기로 하고 아무 곳이나 들어가기로 했다. 톨게이트로 빠져 나간 곳은 황간이었다. 황간 톨게이트를 나가자 바로 작은 모텔이 있었다. 외따로 떨어져 있는 모텔은 아주 조용했다.

 

주차를 하고 차에서 내렸더니 모텔에서 나온 젊은 여자 한 사람이 주차장에서 늦은 시간에 담배를 피고 있었다. 커피잔 셋트를 들고 있는 모습이 다방에서 모텔방으로 커피를 배달왔다가 돌아가는 모습이었다. 조금 있으니 작은 승용차 한대가 와서 그 종업원을 태우고 갔다. 아직도 시골에는 티켓다방이 있는 모양이다. 세상은 아무리 요란해서 실제 변화하는 데는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한 것 같았다.  

 

밖에는 비가 계속해서 내리고 있었다. 작은 모텔방에서 밖을 내다보니 캄캄하기는 하지만 시골의 밤 풍경이 묘한 정취를 풍기고 있었다. 대도시와 다른 적막감이 깃들어 있었다. 인적이 드문 곳에 가끔 지나가는 자동차 소리만 들렸다. 모텔이 기차길 바로 옆에 있었다.

 

기차가 지나가는 소리를 들으니 옛날 대전에서 어렸을 때 기차길 옆 작은 집에서 살던 추억이 되살아났다. 나는 고향인 경기도 포천군 신북면에서 태어났다. 고향에서 서너살때까지 살다가 대전으로 이사를 갔다. 대전에 가서 5-6살 때 나는 기차길 바로 옆 동네에서 살았다. 그래서 친구들과 함께 기찻길에서 많이 놀았다.

 

기차가 오기 전에 못을 철로 위에 놓으면 기차가 지나감으로써 못 머리가 납작해진다. 그것이 아주 신기했다. 기차 소리가 들리면 옆으로 피하는 스릴도 많이 느꼈다. 선로에 귀를 대고 기차가 오고 있는지 그 소리를 듣기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얼마나 위험한 일이었을까?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가 늦게 잠이 들었다. '호텔 캘리포니아' 노래가 생각났다. 어쨌든 기분전환을 위하거나 새로운 정취를 느끼기 위해서는 고급 호텔이 아닌 아주 작은 시골 모텔에서 하루 밤을 머물어 볼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아침 6시에 모텔에서 나와 차를 탔다. 이른 시간에 고속도로를 달리는 기분도 특이했다. 차들이 별로 없었다. 날씨는 구름이 많이 꼈는데 비는 올 것 같지 않았다. 시간이 가면서 해가 나고 맑아졌다. 대구까지 갔더니 포항으로 가는 고속도로가 새로 생겨 있었다. 처음 지나가는 고속도로였다.

 

포항에 들어갔다. 어렵게 전화로 안내를 받아 양학동에 있는 어느 아파트로 갔다. 포철에 근무하는 지인의 집에서 아침 식사를 했다. 아침 8시에 물회와 장어를 준비해서 정성껏 식사를 차려주었다. 고마웠다. 아이들 셋을 다 키우고 열심히 살아가는 그들 부부의 모습에서 많은 것을 느꼈다.

 

큰 아들이 24살인데 군대 갔다와서 직장에 다니면서 야간대학을 다닌다고 한다. 밝은 모습으로 시간을 아껴 무언가 배우려고 하는 젊은이를 보니 참으로 대견스러웠다. 잘못 비뚤어진 아이들이 얼마나 많은 세상인가? 아파트는 25층 고층아파트인데 주변에 숲이 많아 좋았다. 작은 아파트이지만 깨끗하게 청소해 놓고 가족사진하며 아기자기하게 구며놓고 재미있게 살아가고 있었다. 그게 행복이리라.

 

아침 식사 후에 포항시 외곽에 있는 청하 보경사로 갔다. 포항에서 울진 방면으로 약 30분간 가면 월포해수욕장을 조금 지나 보경사가 있다. 보경사는 경북 포항시 북구 송라면 중산리에 위치한 고찰이다.

 

602년 신라 진평왕 시절에 진나라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대덕 지명법사가 창건한 신라고찰이다. 지명법사는 왕에게 동해안 명산에서 명당을 찾아 진나라에서 유학할 때 어떤 도인으로부터 받은 팔면보경을 묻고 그 위에 불당을 세우면 외국의 침입을 막고 이웃나라의 침략을 받지 않으며 삼국을 통일하리라 하였다.

 

왕이 기뻐하며 지명법사와 함께 동해안 북쪽 해안을 거슬러 올라가다가 내연산 아래 있는 큰 못 속에 팔면경을 묻고 못을 메워 금당을 건립한 뒤 보경사라 명명하였다.

 

내연산 입구에 있는 보경사 절을 지나, 연산폭포로 갔다. 연산폭포는 보경사에서 편도로 2.7킬로미터 떨어져 있었다. 정말 경치가 좋았다. 깨끗한 계곡을 따라 흐르는 물소리를 들으면서 등산을 했다. 하얀 돌들이 늘어서 있었다. 계곡의 물이 얼마나 맑은지 작은 고기들이 많이 보였다. 나는 목이 말라 물을 떠 마셨다. 시원했다.

 

연산폭포에 이르면 그 떨어지는 물줄기와 주변 기암괴석 바위들로 감탄사가 저절로 나오게 되어 있었다. 내연산은 710미터 고지다. 향로봉은 930미터고. 연산폭포에는 구름다리가 있다. 구름다리를 건너는 재미 역시 대단했다.

 

폭포을 바라보면서 나는 그 폭포 속에 우리들의 사랑이 감추어져 있다고 믿었다. 떨어지는 물줄기에 가려 물 속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아름다운 색깔만 보여주고 있었다. 그 은은함과 영원성은 우리 사랑의 상징이었다. 나는 폭포를 넋을 잃고 바라보고 있었다.

 

파란 색의 나뭇잎들을 배경으로 진한 그리움이 배어 나왔다. 무엇을 하고 있을까?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한 통의 편지를 읽고 또 읽었다. 내 그리움은 종이 위를 물들이고 있었다. 햇살이 맑게 비추고 있었다.

 

연산폭포를 지나 한 시간 정도 더 올라가다가 내려왔다. 4시간 정도 산행을 했다. 산 속에는 이름 모를 새가 울고 있었다. 마치 사람이 휘파람을 부는 소리처럼 착각이 들었다. 저 새는 내 진한 그리움을 담아 노래하고 있었다. 목이 터져라 울고 있었다. 산들바람에 그리움이 실려 어디론가 날아가고 있었다.

 

보경사 입구에 나오니 연산온천파크라는 깨끗한 온천이 있었다. 목욕을 하고 나왔다. 목욕 후에 느끼는 상쾌함은 산 속의 바람에서 더욱 절정에 이르렀다. 시골 아주머니들이 산딸기를 팔고 있었다. 진짜 산 속에서 따온 것인지는 모르겠다. 산에서 따 먹은 딸기 맛과는 조금 달랐다. 진짜 산딸기는 그 빨간 색깔이 너무 예뻤다. 등산을 하다가 산딸기를 찾아보라. 그 색깔이 얼마나 예쁜지 감탄하게 된다.  

 

경북 울진군 후포면 금음리 바닷가에 가서 건축중인 건물을 보았다. 복잡한 분쟁이 생겨 해결이 어려운 상황이었다. 충분한 설명을 듣고 돌아오다가 영덕대게집에 갔다. 한 마리에 5만원씩 한다. 그런데 다리 한 개씩이 떨어져 나간 게가 많았다. 저녁에는 포항에서 불꽃축제를 했다.

 

사람들과 대화를 하다가 밤 12시가 되어 포항을 출발했다. 포항 - 대구 -김천 - 충주 - 여주 - 동서울 코스로 올라왔다. 새벽 5시가 다 되었다. 힘든 여정이었다. 그래도 짧은 시간에 너무 많은 곳을 돌아다니며 세상을 다시 보게 되었다. 아주 의미 있는 주말 여행이었다.

 

 

*** 6월 12일 / 가을사랑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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